“담배통에 풍년초를 눌러 담고 있는 그 노인의 얼굴에는… 당신 곁을 조급히 떠나고 싶어하는 그 매정스런 아들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도 엿볼 수가 없었다. 성냥불도 붙이려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풍년초 담배만 꾹꾹 눌러 채우고 앉아 있는 눈길은 차라리 무표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청준의 단편 ‘눈길’(1977)의 한 대목이다. 어디 체념의 순간뿐이랴. 고단한 노동을 마친 뒤, 거친 밥상을 물리고 나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한 대 또 한 대…. 봉초(封草) 담배의 대명사 ‘풍년초’는 그 시절 촌로들의 생필품이자 벗이었다.
▦ 봉초는 잘게 썬 담뱃잎을 종이봉투에 담아 팔던 것으로 종이에 말거나 곰방대에 넣어 피웠다. 1945년 9월 광복기념으로 첫 궐련 ‘승리’가 선보였지만 민초들은 값싼 봉초 ‘장수연(長壽煙)’을 즐겼다. 일제 때 브랜드를 그대로 쓴 것인데,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 작명이다. 벼 이삭 그림으로 유명한 풍년초는 1955년부터 17년7개월간 장수했고, ‘수연(壽煙ㆍ66년 발매)’과 ‘학(鶴ㆍ74년)’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옛 전매청(현 KT&G)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봉초 생산을 줄여가다 88년 완전 중단했다.
▦ 그럴싸한 이름과 달리 조악한 품질과 수급 불안정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54년 12월 동아일보에 투고한 한 농민은 “삼분의 이는 담배뼈다구 기타 잡물”인데다 “봉초 한 봉에 궐련 2~5갑씩 강제로 첨가 판매”하는 실태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보리쌀 한 되 값(‘신탄진’)을 연기로 날려 보내는 것은 우리 농촌 실정에선 허영이고 사치다. …농촌에 6원짜리 봉초, 10원짜리 ‘새마을’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다면 전매사업도 민영화하는 것이 낫다”(70년 4월 경향신문 독자투고)는 주장까지 나왔다.
▦ 담뱃값 인상의 파장이 크다. 한 개비에 300원 하는 ‘낱담배’가 등장하고, 말아 피우는 수입산 ‘롤링타바코’ 판매가 급증했단다. 기획재정부가 특히 타격이 심한 저소득층 노인을 위해 KT&G에 봉초 담배 재생산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찬반이 분분하지만, 담뱃값 인상의 목적으로 내세운 ‘국민건강 증진’이 허울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낱담배와 봉초의 부활까지, 나라가 온통 과거로 회귀하는 듯해 씁쓸하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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