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의 옹알이가 시작되었다. 뭐라 뭐라 하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음마, 하는 소리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처럼 겨우 들릴 정도다. 그런데 ‘까’라는 소리를 자주 한다. 여러 상황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담아 ‘까’를 발음하는 까닭에 ‘까아’가 되기도 하고, ‘꺄’가 되기도 하고, ‘까흐’가 되기도 한다. 좋아서, 놀라서, 서러워서 ‘까’한다. 그 많은 ‘까’들이 신기하고 재밌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발버둥치며 울 수밖에 없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말을 배우기 전에 내는 그 무수한 비언어들이 언어보다 절실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소리 이전의 몸의 언어 역시 그렇다.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거나 머리를 들이밀거나 팔을 쭉 뻗거나 얼굴을 비비거나 하는 아기들의 사인을 엄마는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언어를 익히고 나서 우리는 말에 크게 빚지지만 그것으로 전부 다는 아니다. 기쁘거나 행복할 때 말에 앞서 눈빛으로 알 수 있고, 표정으로 느낄 수 있다. 슬픔과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망연자실 주저앉은 이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마주 대할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기대와 좌절, 기다림과 분노 같은 무수히 많은 감정들도 그럴 것이다. 지난 일들을 잊고 새로운 기약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제대로 된 말을 찾지 못한 감정들,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