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지 파주거나 머리 쓰다듬는 영상
청각적 쾌감으로 심리적 안정 효과
"불면증 치료" 네티즌 반응 열광적
컴퓨터 모니터 속 새하얀 면봉이 움직이자 스피커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운, 온 몸을 간질이는 듯한 이 소리는 실은 귓밥 파주는 소리다. 극심한 취업 스트레스로 며칠째 불면의 밤을 보낸 취업 준비생 이모(25)씨는 컴퓨터로 이 영상을 보더니 눈꺼풀이 감긴지도 모른 채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이씨가 시청한 것은 최근 유행하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영상. ASMR은 우리말로 ‘자율감각쾌락반응’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정식 학술용어는 아니지만 수십년 전부터 미국 대체의학 사이트를 중심으로 논의돼 온 음향 심리치료 효과를 기술의 발달로 현실에 적용한 사례다.
원리는 간단하다. 특정 개인의 기억 속에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던 소리를 재현하면 오감을 자극해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귓밥 파주는 영상’ ‘두피 마사지 해주는 영상’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영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08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처음 등장한 이후 미국, 호주 등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도 2~3년 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얼핏 장난으로 치부할 법도 하나 네티즌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한 유명 ASMR 아티스트가 지난달 29일 올린 ‘귀 마사지 영상’에는 순식간에 댓글 120여개가 달렸다.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영상을 틀고 1분 만에 푹 잤다” “ASMR 영상은 내 수면제” “오늘만 세 번째 듣고 있다” 등 찬사가 뒤따랐다. 해당 영상은 게재 3일만에 조회수 2만2,000건을 훌쩍 넘어섰다.
대부분 비전문가의 작품이지만 ASMR 영상에는 고도의 소리공학 원리가 숨어 있다. 배명진 숭실대 소리공학과 교수는 2일 “소리엔 오감에 저장됐던 쾌감을 그대로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며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레 부침개가 연상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한 때 유행했던 아로마 향초가 후각적 안락함을 줬던 것과 비슷하게 ASMR 영상은 청각적 쾌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박탈된 사람들은 가공의 소리를 통해서라도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고 분석했다.
ASMR 영상이 새로운 온라인 수익모델로 부상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조회수가 많은 일부 유명 아티스트는 광고회사와 일정 조회 건수당 돈을 받는 계약을 맺고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2013년 6월부터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게재한 박다함(21)씨는 “간혹 ‘귀르가즘(귀+오르가즘)’이라고 폄하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ASMR은 감정을 움직이는 엄연한 ‘예술’”이라며 “보다 입체적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3D 마이크 등 값비싼 장비를 갖춘 아티스트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직까지 ASMR 영상은 산업이라기보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유행에 가깝다”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가 생산된다면 각박한 현대인의 심리를 파고드는 블루오션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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