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상사가 "자고 가라"며 손목 잡아도 성추행 아니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상사가 "자고 가라"며 손목 잡아도 성추행 아니다?

입력
2015.01.02 18:23
0 0

대법 "손목은 성적 수치심과 무관" 추행 인정한 원심 깨고 환송

"위계 관계·동침요구 정황 무시 사회적 준거 후퇴시킨 판례" 비판

상사가 사택의 침대방에서 ‘자고 가라’며 부하 여직원의 손목을 잡아 당긴 행위가 성추행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손목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신체부위라고 보기 어렵고 추가 행동이 없어 성희롱에 그친다는 취지인데, 상사와 부하라는 위계관계와 동침을 요구한 정황 등을 무시한 시대착오적 판결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서모(61)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춘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일 밝혔다.

2011년 6월 S사 세탁공장 공장장인 서씨는 함께 거주하는 직장동료로부터 밥상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신제품 밥상을 들고 찾아온 여직원 A(52)씨에게 캔맥주 1개를 건네주며 침대방으로 유인했다. A씨는 서씨의 지휘ㆍ감독을 받는 공장 세탁보조 직원이었다. 서씨는 A씨의 거절에도 “그래야 친해진다”며 담배를 권하고, 어색함을 느낀 A씨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일어서자 한 손으로 A씨의 오른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고 당기면서 “자고 가요”라고 말했다. 더구나 당시 서씨의 사택 밖에서는 A씨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1ㆍ2심은 “업무상 자신의 감독을 받는 A씨를 위력을 이용해 추행한 것”이라며 서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반면 대법원은 “추행의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손목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신체부위라고 보기 어렵고 ▦서씨가 A씨의 손목을 움켜잡았을 뿐 쓰다듬거나 안으려고 하는 등 성적 의미가 있는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서씨가 A씨의 손목을 잡은 것은 돌아가겠다며 일어서는 피해자를 다시 앉히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결론적으로 “성희롱으로 볼 수는 있지만 A씨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추행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신체 부위가 정해져 있다는 전제 아래 맥락을 무시한 판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박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상사가 부하 직원을 자기 방에 데려다 놓고 ‘같이 자자’며 신체를 만졌다면 부위가 손목이든 어깨든 충분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법원은 성추행 판례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한 신체 부위를 기준으로 판단해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서씨가 ‘자고 가라’고 한 뒤에 한 행위가 폭행 등 다른 범죄가 되는 것은 별개이며, (손목을 잡아당긴) 행위가 추행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법 적용이 잘못됐다는 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경우 파기환송심에서 검사가 법 적용을 다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서씨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판례 변경 권한이 있는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주민 사무차장은 “대법원의 판례가 성추행과 성희롱의 범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요즘의 사회적 준거를 오히려 후퇴시킨, 남성 중심적 사고가 드러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