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正名)은 드물다. 남루한 현실(合利)이 화사한 이름(合理)으로 분칠된다. 온통 오해다. 정치계는 뻔하고 덩그런 클리셰투성이다. 가짜와 허울뿐인 언어가 정작 세상을 소외시킨다.
“흔히 쓰는 합리적 소비란 말은 원하는 물건 싸게 사는 걸 뜻한다. 거기서 ‘합리’가 추구하는 논리는 이해타산의 논리, ‘합리(合利)’의 합리다. 하지만 저 합리가 온전한 합리가 아니고, 온당한 합리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일이 있었다. 지난 달 28일, ‘블랙 프라이데이’의 일이다. 이날 오전 미국의 온라인 의류소매업체 ‘에버레인(Everlane)’의 CEO 마이클 프레이스먼이 회원들에게 ‘This is Not a Sale’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냈다. (…) ‘우리는 지난 2년간 블랙 프라이데이에 우리 사이트를 닫았다. 모두가 소비 광풍에 휩싸일 때 잠깐 멈춰 ‘합리적 소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올해는 좀 더 적극적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오늘 하루 수익금으로 중국 항조우의 우리 하청공장 직원 320여명과 가족들에게 실외 농구장과 여가시설을 지어주자는 거다. (…)’ 에버레인은 홈페이지 상단에 ‘블랙 프라이데이 펀드’ 적립금을 실시간 공개했다. (…) 소비자가 원하던 물건을 ‘합리적’ 가격에 사서 행복하고 판매자가 재고를 떨어 행복했을 그날, 그들은 자신들이 사고 판 물건을 만든 가난한 나라 익명의 노동자들이 누리게 된 작은 행복으로 행복해했다. (…) 프레이스먼은 자신의 합리로써 소매의류시장의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적 게임, 즉 기업의 이윤 논리와 소비자의 상식적 합리에 저항해 왔다. (…) 연말이라고 여러 기업이 소외계층을 돕는다는 기사들을 읽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업의 사회공헌은 일상의 기업활동, 즉 좋은 일자리 만들고 제 직원과 하청업체 직원, 대리점 계약직원들을 온당히 대우하는 게 먼저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저 ‘사회공헌’은 기업의 일상적 이윤착취를 가리는 베일일 뿐이다. ‘애국’이 그랬고, ‘종북’이 그랬듯, 사회공헌이라는 말도 그렇게 멍이 든다. 초등학교 운동회에도 쓰이고, 도태가 곧 절망인 이 사회의 불의를 숙명인 양 합리화하는 데도 쓰이는 ‘경쟁’이라는 말도 의심스럽다. 말이 온전히 제 뜻을 담지 못할 때, 왜소해지고 부풀려진 말이 일상의 언어가 될 때, 말과 함께 일상도 훼손 당한다고 한다. 그렇게 나도 굴뚝 위 해고노동자의 자리를 제대로 바라볼 눈을 잃고 마음을 잃어왔는지 모른다.”
-어떤 ‘합리’에 대하여(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최근 헌법재판소가 법의 논리가 아닌 편협한 이념의 논리로 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 헌법재판관들은 왜 민주정치 스스로의 자기조정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이 나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삐뚤어진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 그러나 그 뒤 헌재 결정이 언론에서 다뤄지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이 사건 역시 양극화된 말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비판언론의 외침에 가까운 규정을 보는 순간, 한국 민주주의 사망 선언을 그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세어보고 싶은 냉소적 생각이 앞섰다. 강하고 센 말의 인플레이션이 멈출 줄 모르고 심화되는 양극화된 여론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 흔히 말은 ‘생각의 그릇’이라고 하는데 말이 이렇다 보니 그 안에 도통 생각이란 것이 담겨 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저 하도록 되어 있는 특정 코드의 말을 자동적으로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당연히 상투적이 될 수밖에 없다. (…) 상투적이 된 강하고 센 정치 언어는 상대에 대한 거부감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상대를 최대한 욕보여서 그에 대한 지지 여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속한 진영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려 하지도 말하려 하지도 않게 된다. (…)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이 되면 스스로만 공허해질 뿐 달라지는 건 없다. 상투적이 된 세고 강한 말이 갖는 더 큰 문제는 해당 사안과 관련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실체적 내용을 경시한다는 데 있다. (…) ‘여론의 단죄’를 말하든 아니면 ‘역사의 단죄’를 말하든 그런 주장을 이끄는 사명감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심판관이 되고자 하는 열정인 건 마찬가지다. (…) 여론의 반응이 미지근해지면 마치 펜을 꺾고 거리로 뛰어나가야 할 듯 호들갑스럽던 논조는 슬그머니 내려진다. 냉정하게 따지고 자세히 살펴야 할 ‘진짜 문제’도 함께 조용히 묻힌다. (…)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은 강한 입장을 가진 소수의 양극화된 의견집단 때문이라는 진단을 한다. (…) 그러나 그건 좋은 해석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그런 의견집단들의 빠르고 확실한 반응에 의존해 불성실하게 글쓰고 무책임하게 편집해 온 언론종사자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고 앞으로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소란스럽기만 한 ‘비창조적 흥분’ 대신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의 가치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중시되었으면 한다.”
-강한 말의 상투성(경향신문 ‘정동칼럼’ㆍ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 전문 보기
수권하려면 중도우파는 진보가 필요했다. 잡고 보니 종북 손이었다. 극우가 쾌재를 불렀다. 위험한 건 북한이다. 하지만 공포는 전이된다. 시대착오 감정은 반동에게 좋은 불쏘시개다.
“과연 통합진보당이 한국 사회를 주도 또는 전복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경기동부연합 합정동 회합에 나온 것처럼 수입 장난감 총을 개조하거나 손재주로 총기를 깎아 만드는 허술한 방법으로는 도무지 무장 능력을 갖출 수 없을 것 같다. 당 지지율이 1~2%인 통합진보당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을 가능성도 낮다. (…) 법무부가 과연 이걸 몰랐을까? 궁금증은 통합진보당을 보면 풀린다. 6ㆍ4 지방선거 참패 직후 당내에선 이석기 세력과의 공개적 절연, 지도부 사퇴 등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잠깐 나왔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 이들은 종북 논란에 대해 ‘사상의 다양성과 자유’를 주장할 뿐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은 적이 없다. 합정동 모임 사건이 터진 뒤에도, 당이 사라진 뒤에도, 그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저항세력’으로 비장하게 단결했을 뿐이다. 정당해산 심판 청구 직후인 지난해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강제해산 찬성은 45%였으나 헌재 결정 이후 여러 여론조사에선 찬성이 60%를 넘었다. 지난 1년 동안 통합진보당은 삭발, 단식 등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여론은 더 싸늘하게 돌아섰다. 법무부가 노린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통합진보당의 쇄신 없는 단결, 그로 인한 고립 심화. 통합진보당과 선거연대를 했던 새정치연합에서도 내년 2ㆍ8 전당대회를 앞두고 “무원칙한 야권연대로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 이들을 원내로 진입시킨 정치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종북연대’라는 새누리당의 고전적 레토릭(수사)이 당내 경쟁 국면에서 서로에게 겨누는 칼날이 되고 있다. 공안정국을 기획·집행하는 이들에게 종북은 야권을 퇴행·위축·분열시키는 요모조모 쓸모있는 도구다. 통합진보당을 발본색원하려는 이들이야말로 종북주의자들이 멸절되면 곤란하다.”
-‘그들’도 종북이 필요했다(한겨레 ‘한겨레 프리즘’ㆍ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 전문 보기
“북한은 너무 가까이 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라면 잘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한때 우리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거리 두기를 방해한다. 그 때문에 북한에 대한 생각이나 말은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건 숭배와 찬양일 수도 있고, 적대와 혐오일 수도 있으며, 공포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적진에서 합법과 비합법의 이중생활을 하는 전사라고 믿는 이들에게 북한은 경외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 보수는 북한을 적대하고 혐오하는 쪽을 대표한다. (…) 시대적응을 못한 보수는 자기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다. 국가보안법, 북한인권, 대북 전단 살포같이 북한 문제가 있어야만 온전히 자기 이념을 드러낼 수 있다. 보수는 북한이라는 거울이 있어야 자기 얼굴을 보고, 북한이라는 창이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다. (…) 그래서 감각이 떨어지지 않게 끊임없이 자극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종북론이다. (…) 그래서 통합진보당과 보수에게 북한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이다. 숭배하든 혐오하든 북한은 진보당과 보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헌법재판관들은 북한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대표한다. (…) 139, 140쪽을 주목해보자. 나치당은 1928년 5월 선거에서 겨우 2.6% 득표했다. 그러나 2년 뒤 18%, 다시 2년 뒤 37.2%로 제1당이 되었다. 이런 현상이 “현실정치의 역동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향후에 결코 다시 발생하지 않을 일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고 했다. 법률가들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공포감이었다. (…) 나치당의 부상은 우파 폭동, 좌파 반란이 빈발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정세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보수정당이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항상 다수당으로 남아 있고 진보정당은 존재감이 없는 한국정치 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진보당이 몰락 중이고 진보당이 추종한다는 북한도 몰락 중이다. (…) 공포의 요소는 하나도 없다. 요즘 보수 쪽에서 선수 교체론이 나온다. 낡은 진보 대신 합리적 진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 보수 쪽 선수도 바꿔야 한다. 북한으로 연명하는 낡은 보수는 해산해야 한다. 기득권 보호자 헌재를 진정한 헌법 정신의 수호자로 개혁해야 한다. 이렇게 선수 교체해서 공정 경쟁할 수 있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 북한을 추종하고, 북한을 추종하는 자를 쫓고, 북한을 숭배하고 혐오하고 북한에 공포감을 느끼는 북한 중심의 한국 정치, 북한을 기준으로 한 우리의 낡은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선수들은 교체되지 않을 것이다.”
-보수ㆍ진보 선수 교체론에 대해(12월 25일자 경향신문 기명 칼럼ㆍ이대근 논설위원)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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