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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홀가분해지세요

입력
2014.12.2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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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한 친구들과의 망년회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의 절친한 친구들이지만 언제부턴가 연말 망년회가 아니면 함께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망년회를 명절 삼아 그나마 일년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우린 반갑게 서로를 반겼다.

친구들과의 망년회 분위기도 세월이 지나며 많이 달라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 잘난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술잔을 부딪쳤는데, 이젠 그 허세들이 잦아들었다. 다들 희끗해진 머리와 깊어진 주름의 나이를 수긍하기로 한 것인지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졌다.

몇 순배 잔이 돌자 자칭 투자 전문가라던 친구는 사실 남은 게 없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임원 그 이상을 꿈꾸며 언제나 당당했던 친구는 지금 후배를 상사로 모시며 ‘버티고’ 있음을 자책했다. 검사 출신의 친구도 예전 같으면 사건의 뒷이야기를 재미있게 떠벌렸을 텐데, 그날은 변호사 사무실 운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털어놓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허풍을 걷어낸 대화의 장, 친구들은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올해 모임이 특이했던 건 모두들 ‘우울’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스트레스로 잠을 못 이뤘다던 한 친구는 결국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를 불면하게 만든 스트레스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레 잔을 부딪쳤다. 친구의 쓸쓸한 고백이 끝나자 여기 저기서 우울을 훈수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우울증 치료를 통해 나름 전문가가 된 친구의 충고에 이어, 아이의 오랜 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의 한이 사무친 경험담이 보태졌다.

우울에 대한 대화가 이어질 때 유독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이 없어진 친구가 있었다. 무겁게 입을 연 그 친구는 실은 10여 년 전 어머니를 우울증으로 떠나 보내게 됐다며 상가에서도 전하지 않던 일을 이제야 털어놓았다.

분노조절 장애를 지닌 히스테리컬한 상사를 저주해오던 친구 한 명은 친지의 우울증을 경험하곤 상사 또한 병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자 측은함으로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열리게 됐다고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4년. 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올해는 분명 ‘세월호’의 그늘이 가장 짙고 깊게 드리워진 해일 것이다. 전 국민을 슬프게 하고, 분노케 하고, 우울에 빠지게 한 참사였다.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세월호 뉴스만 지켜보다 결국 정신과에 갈 정도로 우울의 늪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생존해 돌아온 단원고 학생 한 명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아파하기도 했다.

304명의 목숨을 수장시킨 그 비극의 엄청난 후유증을 우린 어떻게 치유해나갈 수 있을는지. 세월호 참사 이후 모든 일을 접고 희생자 가족들에게만 전력을 쏟고 있는 정혜신 정신과전문의는 공감을 통한 치유를 그 방법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더 많은 공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월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친구들과의 망년회 자리가 파할 때, 우린 서로의 우울을 공감한 것만으로도 조금은 후련해질 수 있었고 모처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2013년 2월에 개봉했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충격으로 분노조절 장애에 빠졌던 남자 주인공과 남편의 죽음으로 조울증을 앓았던 여주인공이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비정상의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애정의 표현들이 그 어떤 사랑의 미사여구보다도 로맨틱하게 느껴져 재밌게 봤던 영화다. 제목의 ‘실버라이닝’은 궂은 날씨가 끝나고 이제 하늘이 개려고 하는 순간, 먹구름의 가장자리에 생기는 하얀 빛을 이야기한다. 즉 불행 속의 한 가닥 빛나는 희망이란 뜻일 게다.

정혜신씨는 저서나 강연에서 ‘홀가분하다’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는 심리 치료의 궁극적 목표는 홀가분한 상태라고 했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중에서 쾌(긍정)의 최고 상태인 단어가 바로 ‘홀가분하다’라고 한다. ‘죽인다’ ‘앗싸’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쾌의 수사가 홀가분인 것이다.

이제 곧 열리는 2015년, 우울에 짓눌린 모두에게 실버라이닝이 비쳐지기를. 제발 많은 이들이 홀가분해지시길.

이성원 사회부 차장대우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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