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가 사상 최대의 전쟁터로 변해 버린 제2차대전이 끝나고 70주년이 지났다. 무지하고 탐욕스러웠던, 두렵고 잔인했던 그 전쟁이 멈추고 20년 만에 그 혼돈의 자락 한 귀퉁이에 있던 한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적대관계를 거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 지금 두 나라 관계, 양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감정은 최근 십 수년 간 최악의 상황이다. 한일 관계는 이대로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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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대사를 지낸 유명환(69) 전 외교부 장관은 현재의 한일관계를 최악이라고 규정했다. 유 전 장관은 최근 총선에서 압승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외정책도 ‘신중한 접근’을 예측하면서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유 전 장관은 그러면서도 “개인관계처럼 국가관계도 항상 상대를 존중하면서 진의를 보려는 탐색을 해야 한다”며 우선적인 대화를 통한 관계개선을 주문했다.
유 전 장관은 외교부 청사 인근의 개인 사무실에서 진행된 한국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이 이제는 서로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이 지금처럼 역사수정주의에 매몰돼 있으면 일본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불행을 초래하고 한국도 반일 프레임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유 전 장관은 “설령 일본이 역사인식을 잘 못해도 우리가 대범하게 리드해야 한다”며 유연한 접근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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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국교 정상화 50주년인데 한일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큰 시대의 흐름을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일본 국민들의 생각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동북아 세력 균형이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국의 교역, 투자, 관광 대상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이 일본을 무시하고 중국 편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게다가 일본은 지난 20년 ‘잃어버린 시대’라고 하는 장기 경제불황, 청년 일자리 부족 등에서 오는 좌절감도 크다. 세대교체를 거친 일본 사람들은 이제 한국을 대등한 이웃나라로 본다. 일본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감이 생겼고, 일본 사람들이 그런 우리 행동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이웃국가로서 일본 사람들 마음 속 변화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_한일갈등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위안부 문제다.
“일본 내 일부 여론, 특히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려는 일부 우익들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가 부각될수록 일본으로서는 지는 게임이다. 증거가 너무 많다. 일부 강제성이 있다 없다 하는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일본 군대가 전쟁 중에 직접 관여해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모집 과정에서도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 등은 많은 이들이 안다. 증언도 많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도 기록이 많이 있을 것이다.”
_일본이 인정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를 한국 정부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우리 외교부는 1993년 고노 담화 발표 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선 더 이상 일본 정부에 협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면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공식 인정했고, 피해자들에게 총리가 사죄하는 서한도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위로금도 일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인정하라고 지난 20년 동안 매주 집회를 해왔다. 양국 정부가 잘못한 것은 20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이런 요구가 있었다면 뭔가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에 요구하는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 금전적 보상 등은 90년대 초 하던 것과 똑같다.”
_일본 정부의 사과와 인도적 조치를 위한 자금 지원 등 위안부 문제 해법을 담은 이른바 ‘사사에안’도 이제는 거론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지난 정부에서 일본이 먼저 제안한 것이지만, 지금의 일본 정부는 그러한 합의가 된다 해도 그걸로 끝나는 것인지 확신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 아베 정부는 이를 내키지 않아 한다. 외교는 상대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상대가 항복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안 된다면 그 대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외교 교섭이다.”
_타협점은 없을까.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다시 강구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는 일본의 금전적 보상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피해자들은 일본이 주는 위로금 대신 한국 정부가 주는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위안부 할머니들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주고, 일본이 정부 예산으로 금전적 보상을 한다고 하면, 우리 정부가 말릴 길은 없다. 법적 책임 문제를 갖고 20년 이상 논쟁을 해왔지만 이것은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한국 측 정대협이나 일본 측이 모두 동의하는 해결책이 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_위안부 문제 해결을 한일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정부의 접근방식은 옳은가.
“위안부, 과거사 등은 국민 감정의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못 만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일 정상회담을 했는데 다시 그런 문제에서 감정이 폭발하면 한일관계는 더 꼬이고 악화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냉랭한 양국 관계는 국내 측면에서 보면 타당할지 몰라도 이것은 한일관계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미관계까지 연결되는 게 문제라는 점을 봐야 한다. 한일관계 악화는 정치 외교 군사 측면에서 미국에 부담이 된다. 미국 입장이나 국제여론에서 볼 때 한국이 너무 융통성 없는 외교를 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_한일관계 개선 로드맵을 잡는다면.
“서울이나 도쿄에서 바로 한일 양자간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부담이겠지만 국제회의, 다자무대에서 만나는 건 부담이 줄어든다. 또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북핵 위협 대처 등 다른 이슈부터 논의를 하면 된다. 박 대통령의 걱정은 공감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유연하게 나갈 필요도 있다.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이분법적으로 얘기하기보다는 조금씩 현실적으로 조정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_한중일 외교장관 회담 후 한중일 정상회담, 한일 정상회담 개최 수순도 얘기가 나오는데.
“그게 가장 현실적인 로드맵이다. 2015년이 수교 50주년이기 때문에 한일 정상이 만나 미래 50년을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논의했으면 한다. 1998년 김대중 오부치 두 정상이 만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했다. 이제는 제2의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만들어야 할 때다. 과거 굴레를 훌훌 털어내야 우리 젊은 세대들의 부담도 줄어들 것 아닌가.”
_50주년을 맞는 한일협정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본협정을 비판하는 사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일본이 사죄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협정 체결 당시 한일 합방이 불법이냐 아니냐 서로 정의를 않았고 협정 발표 당시 모호하게 성격 규정을 하고 넘어간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 고치는 건 무의미하다. 50년이 넘었고, 중요한 건 한일간 제2의 파트너십 선언을 하면 그게 협정에 버금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_독도 문제는 어떤 외교전략이 필요한가.
“독도 문제의 경우 일본이 센카쿠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된다. 아주 조용히 처리한다. 일본은 국제법 국제해양법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분쟁 지역이 아니라는 걸 인식시키려 한다. 독도를 우리가 실효지배하고 있는데 왜 일본이 문제를 제기할 구실을 주는 것인가. 국제법 추세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에 시비를 걸 여지를 주면 안 된다. 독도 접안시설 예산이 있다면 차라리 울릉도에 관련 시설을 건립하면 어떨까. 독도는 연약한 섬이다. 천연기념물 보호 정신을 살려야 한다. 자꾸 독도에서 뭔가를 하면 독도 영유권 강화가 아니라 훼손이다.”
_향후 한일관계 전망은.
“우리도 일본을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하고 일본도 한국을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한다. 일본의 경우 한국을 과거와 같이 단순하게만 보지 말고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위치에 있는지 충분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일본이 역사 수정주의적 행동을 보이면 일본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불행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너무 반일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이 정도로 국력이 신장됐는데, 일본이 설령 역사 인식을 잘 못해도 우리가 대범하게 리드해야 하지 않겠나. 일본 사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만 대할 게 아니고 열린 마음으로 한일관계를 대범하게 이끌어갈 수 있도록 조금 더 큰 그림을 보고 나갔으면 한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유명환 장관 약력
1946년 경기 시흥 출생
1970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73년 외무고시 7회 합격
1992년 외교부 공보관
1996년 북미국장
1998년 주미대사관 공사
2002년 주이스라엘대사
2004년 주필리핀대사
2005년 1차관
2007년 주일대사
2008년 외교통상부 장관
2013년 세종대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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