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시위 들끓은 한 해… '표현의 자유' 탈 쓰고 법치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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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시위 들끓은 한 해… '표현의 자유' 탈 쓰고 법치 허물다

입력
2014.12.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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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해산으로 마귀 뿌리 뽑혀" "동성애자 때문에 에이즈 속출"

혐오 발언 처벌 세계적 추세 불구 법제화 논의 없고 정부마저 방관

대한민국어버이연합과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8월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 본사 앞에서 세월호 선동세력 규탄집회에서 세월호 단식과 관련해 조롱하며 자장면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늘은 대한민국 마귀의 뿌리가 뽑히는 날이다.”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선고 직후 보수단체 한겨레청년단의 박완서 부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0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열린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장에서는 일부 보수 기독교단체들이 몰려들어 “동성애자 때문에 에이즈가 속출한다” “에이즈나 걸려라”라고 소리지르며 공청회를 방해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혐오 발언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같은 일부 극우사이트에서 성행하던 혐오 발언이 오프라인에서의 실제 행동으로 옮겨간 해로 기록될 만했다. 혐오의 대상도 기존의 외국인노동자, 탈북자, 호남, 종북좌파 등에서 세월호 유가족, 성소수자 등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재미동포 신은미씨의 토크콘서트장에 연막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투척돼 강연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해있다. 뉴시스

황산테러까지 부른 혐오

사회학자들은 지난 10일 오후 전북 익산의 한 성당에서 발생한 ‘신은미ㆍ황선 토크콘서트’ 황산테러를 전형적인 혐오 범죄로 꼽고 있다. 고교 3학년 오모(18)군이 황산과 인화물질이 든 냄비를 연단으로 던지려다 제지 당하는 과정에서 2명이 화상을 입은 이 사건은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가 범죄의 동기로 파악돼 충격을 줬다. 일베의 준회원이었던 오군은 경찰 조사에서 “북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던 중 종북 논란에 휘말린 신씨의 콘서트를 방해하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혐오가 집회현장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올해 7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불과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엄마부대봉사단, 탈북여성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유족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맞불집회를 열었다. 이들의 손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다’ ‘사고로 희생된 자식 의사자라니’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다. 일부 회원은 유족들의 면전에 “세월호 이제 지겹다. 누가 죽으라고 했느냐” 등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일베 회원들은 9월에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장 뒤에서 치킨과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이는 패륜적 행동도 보였다. 1940년대 반공 폭력조직을 재건하겠다며 등장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는 서울시청 앞 세월호 희생자 추모 리본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과 폭력도 공공연히 이뤄졌다. ‘에스더 기도운동’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단체와 보수단체들은 10월 ‘성적 지향 등에 따라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가 열릴 때마다 몰려가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 사회자인 박래군 서울시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의 멱살을 잡는 등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엄마부대봉사단, 탈북여성회,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7월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가족 단식농성장' 앞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네요",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자식 의사자라니요", "유가족들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의사자라니요" 등이 쓰인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동조 단식 돌입 기자회견을 하려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회원들과 충돌을 빚다가 경찰의 설득으로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혐오도 표현의 자유인가

혐오를 표출하는 단체들은 “내 생각을 말하지도 못하느냐”고 항변한다. 이런 당당함의 배후에는 표현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하는 절대적 권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현장에서 혐오 발언을 접해온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듣는 사람이 모욕으로 느꼈다면 자유가 아닌 방종에 불과할 뿐인데도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잘못된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문제는 혐오 발언을 막아야 할 정부도 표현의 자유라는 프레임에 갇혀 혐오 발언을 용인하는 방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0일 파행으로 치달은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공청회에서도 보수기독교 단체들이 폭력적으로 논의 진행을 방해했지만 경찰과 서울시 관계자들은 이들의 난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시는 보수단체들의 혐오 발언 등을 고려, 시민인권헌장을 폐기했다.

정부가 혐오 발언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정부가 극우보수단체에 보조금까지 지원하면서 종북몰이 활동을 키우는 ‘혐오의 정치’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황산 테러 사건과 관련해 ‘종북 문제’만 언급한 데 대해 “범보수세력은 혐오 표현을 일삼는 세력과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줘야 했다”며 “이런 정치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범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11일, 어버이연합, 한겨레청년단, '일베'(일간베스트) 카페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광화문 농성장이 불법시설물이라며 농성장에 난입해 강제철거를 시도한 모습. 오마이뉴스 제공

“혐오 표현은 명백한 차별, 규제해야”

전문가들은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세계적으로도 혐오 발언의 처벌은 일반적인 추세가 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호주 브라질 등에서는 인종, 종교,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를 드러내는 모욕적, 위협적 표현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해 놓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 나라에서 혐오 표현을 기반으로 한 범죄는 더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홍성수 교수는 “차별사유에 해당하는 혐오를 근거로 발생한 폭력은 가중 처벌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법제화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해 11월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의원이 혐오 범죄(증오 범죄)를 가중처벌하는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혐오 범죄에 대한 개념 정립도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아 1년째 국회에 계류중이다. 변호사와 법학자로 구성된 성적지향ㆍ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의 정현희 상임연구원은 “혐오 표현을 우선 차별로 규정한 뒤 관련 내용을 차별금지법에 넣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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