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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씁쓸한 세밑 풍경

입력
2014.12.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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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켰다. 잠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별다른 고정채널을 찾지 못한 사이,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현란하기 그지없는 광고영상들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 넘쳐난다. 강요된 소비충동을 피해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보지만 당신의 지갑을 열어달라는 ‘바보상자’의 주문은 리모콘 버튼질이 무색하도록 사방 가득 그칠 줄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처연한 ‘감동’으로 채색된 어느 대형 국제개발협력기관의 모금광고영상에 눈길이 머문다. 연말 분위기 탓일까. 모금을 독려하는 동종 기관들의 광고영상들이 다양해진 채널 수 만큼이나 꽤 눈에 들어온다. 새까만 피부에 갈비뼈가 다 드러날 만큼 깡마른 아이들이,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퀭한 눈동자의 여성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소위 제 3세계 국가의 가난과 궁핍의 현실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지면서 안방으로 스며든다. 한결같이 동정심을 자극하는 장면들에 이어 장중한 음악이 곁들여지면서 곧 이어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달라는, ‘당신’만이 희망이라는 식의 내레이션이 호소력 짙게 흩어진다.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취지임에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살며시 불편해진다. 왜일까. 그들에게는 가난이라는 형상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고단한 일상을 실감나게 내보인 그들을 위해 당장 지갑을 열어 해당 기관의 계좌번호를 두드리려다 말고 잠시 딴 생각을 해본다. 가난한 그들에게 내가 주려는 것은 ‘희망’인가 아니면 ‘동정심’인가. 먹고 살 만한 ‘나’와 절망 속의 ‘그들’로 자연스럽게 경계 짓고 구분되어지는 이 현상은 무엇인가. 또한 희망의 기준은 대체 무엇이고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인가. 단지 고통 속의 이미지들만 본 것일 뿐인데 생각은 어이없이 설익은 존재론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미지 언어는 감성에 호소 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반복적 차용이 이어지면서 타인의 고통에 점차 둔감해지게 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생명과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일에 의지를 갖고 있는 이라면, 더구나 이미지 언어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는 이들이라면 이에 대한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논해야 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미루거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얼마 전 이 지면을 통해 국제개발협력 기관들에게서 나온 자성의 목소리를 전한 바 있다. 가난이라는 ‘선정성’ 이미지를 활용한 자신들의 홍보모금방식이 지나치게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수용자로 하여금 왜곡된 시각을 품게 만들고 있으니 이를 자제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기관들 제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미디어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다는 불과 몇 개월 전의 취지와는 무색하게, 연말연시를 맞아 방송채널 곳곳을 장식하는 각 기관들의 후원모금 홍보영상들에는 여전히 빈곤에 따른 고통만이, 아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통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참으로 씁쓸하다. 어려운 이들을 위한 온정의 손길은 무엇보다 필요하지만 모금액을 늘리기 위해 가난과 궁핍으로만 점철된 이미지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방식은 이제 멈출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홍보영상 속 신뢰감 높은 진행자의 내레이션은 월 몇 만원에 당신도 천사가 될 수 있다며 부드럽게 속삭이지만 자칫 권유가 아닌 ‘강요’처럼 들릴 수도 있다. 오히려 이와 같은 방식은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인 인간의 존재적 존엄성을 고통이라는 병풍 속에 가려놓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풍을 치우고 보면 가난하지만 귀한 ‘삶’이기에 볼 수 있는 감동의 순간들이 동정이 아닌 ‘공감’이라는 시선으로 우수수 눈에 들어올 수 있으니 말이다.

몇 해 전 인도 최대의 도시 뭄바이의 한 거리를 지나가다가 대여섯 명의 걸인가족들과 마주쳐 잠시나마 함께 시간을 나눈 적이 있었다. 모두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몸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진동할 만큼 ‘가난’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해맑기 그지없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모습에 반응해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있었던 기억이 지금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구걸을 위해 내민 손바닥에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 틈을 비집고 햇빛 한줌이 소리 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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