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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보드카와 민심이반

입력
2014.12.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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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러시아의 기원인 고대 ‘키예프 루시’의 지배자 블라디미르 대공은 정신적 풍요를 갈구하며 국교를 정하기 위해 주변국의 사절단을 불러 모았다. 대공이 처음 대면한 사절단은 이슬람 사람들이었다. 대공은 이들로부터 이슬람은 음주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아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술은 러시아 사람들의 기쁨이니, 그런 기쁨이 없이는 살 수가 없도다”라는 말을 전하며 이슬람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러시아 최초 역사서에 나오는 일화로 대공이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에 반해 동방정교를 나라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었던 일이다.

▦ 가혹한 추위에 햇볕도 잘 나지 않는 러시아의 겨울은 무색의 증류주 ‘보드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날씨다. 원래 눈밭에 파묻어 얼려 먹었다고 한다. 얼려 걸쭉해진 보드카는 찬 기운에 목에 걸리는 일 없이 술술 넘어간다. 독주를 그렇게 마시다가 인사불성이 되기 십상이지만 숙취가 없다. 알코올도수는 들쭉날쭉했지만 제정러시아 시기에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논문 ‘알코올과 물의 결합’이 발표된 뒤 40도로 굳어졌다. 멘델레예프는 40도가 인간의 입맛에 가장 적합하다는 실험결과를 내놓았다.

▦ 떼려야 뗄 수 없는 보드카에 관한 여러 얘기가 전해진다. ‘영하 40도 혹한에는 살아도 보드카 없이는 못 산다’거나 ‘여자보다 더 좋아하는 하얀 마법’이라는 말도 있다. 백미는 ‘바닷물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보드카 술잔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러시아는 알코올 중독자나 사망자 수가 세계 최상위권이다. 구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알코올 중독을 줄이려 보드카 생산을 줄이는 ‘금주령’을 펼치다 홍역을 치렀다. 가격폭등에 밀주 성행, 가짜 보드카로 인한 사망자 속출이 빚어지면서 인기추락의 원인이 됐다.

▦ 최근 유가하락과 서방의 제재에 물가폭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24일 “보드카 가격 급등은 밀주 소비를 늘릴 뿐”이라며 보드카의 가격 안정을 특별 주문했다. 최대의 경제 위기에 직면한 푸틴 대통령의 머릿속에 고르바초프 때의 민심 이반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 때문인지, 세금 때문인지 명분이 알쏭달쏭한 4,500원 담뱃값 시대가 며칠 남지 않은 우리나라는 부작용이 없을지 자못 궁금하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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