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 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라는 노랫말을 즐겨 흥얼거린다. 노래의 화자가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후회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더 이상 젊은 육신이 아닌 이들이 젊음을 갈망하고 심지어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이 시절을 후회 없이 보내야겠다는 결심은 더 강해진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50대 이상 어르신들이 의지가 요구된다는 요지의 글을 쓴 적 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취업의 기회가 더 많았고, 지금보다 높은 금리로 저축의 결실을 맛볼 수 있었으며, 금리 덕에 월세보다 세입자에게 좀 더 유리한 전세라는 제도가 보편화됐던 시기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지금은 일자리 자체가 적고, 특히 양질의 일자리는 희박하며, 집값과 생활물가는 너무 높고 임금과 금리는 너무 낮다. 때문에 부모의 재력에 따라 인생의 출발지점이 극명히 갈린다. 젊은 세대는 열패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믿을 때, 혹은 이것만 참으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 열정이 생기는 존재가 인간이다. 출산도 안 한다. 이러다 한국인의 씨가 마르게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SNS에 그 글을 공유했다. 자신의 말을 덧붙여 글을 공유한 사람, 공유 글에 댓글 달은 사람들을 목격했다. 중국 부호가 “35살이 될 때까지 가난하다면 그건 네 탓”이라고 말했다며(오역으로 밝혀졌는데!) 남 탓 하지 말라는 훈수, “그래서 나이든 사람이 부럽다는 거? 나는 10억을 주더라도 젊음을 살 수 있으면 사겠다”는 반응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밑바탕에 깔린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음을 가지고 있으니 넌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징징대지 마! 난 그 젊음이 엄청 부러우니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어른들의 마음에 질투가 서렸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계기다.
어르신들 마음을 헤아려 본다. 전쟁이 만든 폐허를 목격했다. 슬펐다. 하지만 그 전에 배가 고팠다. 가난했다. 열심히 일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어느 정도의 ‘민주화’도 성취했다. ‘IMF 시대’의 컴컴한 터널도 간신히 통과했다. 이제 삶에 여유 시간이 생겼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다.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훨씬 좋은 세상에 살면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도전정신도, 패기도 없어 보인다. 그 젊음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줘!
하지만 탄생과 죽음의 순환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잠시 빌려온 것, 노력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초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예정된 고통을 줄이는 길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한다. 허무하지만 육체가 사라져도 정신은 남는다는 사실은 조금 위안이 된다. 세월 동안 쌓은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며 인류는 나아질 수 있고, 그렇게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그 정신은 불멸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유산과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한국사회의 존속을 위한 구조적 개혁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무력한 마음과 자신에 대한 연민을 덜고, 현존하는 젊음의 미래를 염두에 두는 어른들, 그런 멋진 어른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나 역시 나이 들어 스스로를 연민하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생각은 휘발된다. 글은 남는다. 예정된 상실에 초연하고,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으며, 다음 세대를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남긴다. 일단 그 때까지 젊은 날을 후회 없이 보내련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젊음은 남에게 증여할 수도 없고, 아껴봤자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년에도 젊음을 마구 써버리겠다는 말이다. 내년에도 개선돼야 마땅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눈치 보지 않고 발언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추억을,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결심한다.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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