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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결투...오래도록 멈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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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결투...오래도록 멈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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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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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건축 특유의 양파머리 돔 '꾸뽈'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은 알렉산드르2세가 피살당한 자리에 지어졌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다룬 그림들이 건물 외관을 감싸고 내부에는 화려한 모자이크화가 가득 차 러시아 정교회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러시아 건축 특유의 양파머리 돔 '꾸뽈'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은 알렉산드르2세가 피살당한 자리에 지어졌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다룬 그림들이 건물 외관을 감싸고 내부에는 화려한 모자이크화가 가득 차 러시아 정교회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로망'을 품은 도시다. 이 지명을 소리 내 읊을 때마다 누군가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고골 등 기라성 같은 러시아 문학가들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황홀해하고 누군가는 네바강에서 순양함 오로라호의 대포 소리를 떠올리며 러시아 10월 혁명을 반추하기도 할 것이다.

서울에는 영하 7도의 강추위가 몰아쳤던 지난 10일에서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혹독한 북극의 추위를 각오했다. 고골의 소설 '외투'에서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에비치가 헤진 외투를 입고 출근하며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같은. 하지만 온도계는 영하 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양성 기후로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따뜻하다는 이곳에선 대신 볼을 때리는 바람이 매서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 순방을 다녀온 표트르 대제가 암스테르담과 파리 등 유럽의 도시들을 본 따 1703년부터 늪지대 위에 세운 계획도시다. 1712년부터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고,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는 러시아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고전주의·바로크·모던 등 온갖 양식의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 자체가 박물관과 같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아직 야간 조명이 꺼지지 않은 넵스키 대로의 아침 9시 풍경. 왼쪽 첫번째 건물은 20세기초 미국 재봉틀 회사의 소유였가가 지금은 서점이 자리잡았다.
아직 야간 조명이 꺼지지 않은 넵스키 대로의 아침 9시 풍경. 왼쪽 첫번째 건물은 20세기초 미국 재봉틀 회사의 소유였가가 지금은 서점이 자리잡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곧 넵스키 대로다. 옛 해군성 건물부터 시작하는 길이 4.5km, 폭 30m가 넘는 쭉 뻗은 거리를 중심으로 이 도시 명소 대부분이 들어차 있다. 황제의 거처였던 에르미타주 겨울궁전을 시작으로 40년의 공사 기간 동안 10만명이 죽어간 도시의 랜드마크 성 이삭 성당, 알렉산드로 2세가 암살당한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반원형의 회랑에 늘어선 압도적인 크기의 카잔성당까지 대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한국으로 치면 경복궁부터 숭례문, 해인사와 국립중앙박물관까지 몰려있는 셈이다. 1915년에 세워진 건물이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넵스키 대로는 제정 러시아 시절 모습 그대로다.

아침 8시.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창 밖을 내다본다. 넵스키 대로에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아침을 먹고 있는 건지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털 코트로 중무장한 사람들의 발걸음도 출근하는 것인지 퇴근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둠은 오전 10시가 다 돼서야 걷혔다.

오전 10시 30분. 해가 나지 않는 잿빛 하늘에 매서운 바람까지 가세해 몸이 떨린다. 이럴 때에는 박물관 행이 최선이다. 에르미타주는 과거에는 황제의 거처였지만, 현재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다. 38점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렘브란트 컬렉션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수집한 예술작품 300만점이 5개의 건물에 보관돼 있다. 금박으로 장식된 내부에 눈이 부시다가 18세기에 영국에서 사들였다는 실물크기의 황금 공작새 시계에까지 이르면 그 사치스러움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은자의 안식처'라는 소박한 뜻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겠다. 최근 한국어 지도와 오디오 가이드를 비치해 한국 관광객도 둘러보기 한결 수월해졌다.

올해로 개관 250주년을 맞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앞에 알렛산드르 1세를 기리는 탑이 주변을 압도하며 우뚝 솟아있다.
올해로 개관 250주년을 맞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앞에 알렛산드르 1세를 기리는 탑이 주변을 압도하며 우뚝 솟아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야경.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에르미타주 박물관 야경.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에르미타주엔 러시아의 작품은 없다. 러시아 예술을 느끼고 싶다면 국립 러시아박물관에 가야 한다. 역시 만만찮은 규모의 박물관에서는 고대 러시아 예술부터 민족적인 테마를 반영한 19세기 전반의 회화와 사실주의로 접어든 19세기 후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나폴레옹과 맞서 승리를 거둔 국가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오후 4시. 벌써 어둠이 몰려온다.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여름과 뚜렷이 대비되는 날씨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즐기는 방식은 계절마다 다르다. 여름에는 밤새도록 야외음악회가 이어지고 겨울에는 발레와 오페라 등 실내 공연이 새 시즌을 시작해 저녁을 풍성하게 만든다.

러시아 발레의 전설 안나 파블로바가 1905년 '빈사의 백조'를 연기한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이날 저녁에도 그녀를 좇는 새로운 주인공이 '지젤'로 데뷔했다. 관객들은 100여 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닥다닥 붙은 나무의자에 불편하게 몸을 구겨 넣고 가느다란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을 정신 없이 쫓았다.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난 극장 앞은 쏟아져 나온 인파로 도로가 미여 터졌다.

눈 덮인 국립러시아박물관 건물 앞에는 시인 푸시킨의 동상이 서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눈 덮인 국립러시아박물관 건물 앞에는 시인 푸시킨의 동상이 서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센나야 광장 근처 도스토옙스키의 생가에 놓인 조화.
센나야 광장 근처 도스토옙스키의 생가에 놓인 조화.

오후 10시. 발레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넵스키 대로를 걷다 보면 시인 푸시킨이 결투 전 마지막으로 찾은 '문학카페'와 마주치게 된다. 운하가 보이는 단골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앉은 푸시킨은 레모네이드를 시키고 결투를 하러 갔다가 결국 졌다. 이후 이 카페는 레모네이드를 팔지 않는단다. 푸시킨이 앉았다는 그 자리에 순례객이 홀로 차를 홀짝이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시킨 뿐만이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많은 러시아 문호들의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소설 '죄와 벌' 의 배경이 된 센나야 광장과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거처로 설정된 집,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생가는 서로 지근거리다. 도스토옙스키의 생가 벽에는 한 다발의 조화가 놓여있고 대각선으로 5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집 벽에는 이런 글귀가 적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인들의 비극적 운명은 그로 하여금 인류의 선을 열렬히 전파하는 초석이 되었다'.

부지런히 걷다 출출해졌다면 러시아식 프랜차이즈 식당 '쩨레목'에서 우리네 김밥에 해당하는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린'을 맛보는 것도 좋다. 초코 크림을 바른 것부터 버섯크림소스를 넣은 것까지 다양한 종류에다 가격도 300루블(약6,000원) 이하로 저렴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국인 관광객 수는 연간 3만명 수준. 지난해 전세계에서 630만명이나 찾아온 관광도시임을 감안하면 한국에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그 때문일까. 국내에서도 한글 관광책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고 현지에서는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쉽게 통하지 않는다. 10개 언어로 제공한다는 시티버스투어에도 한국어 서비스는 빠져있다. 겨울에는 한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항공기 직항편도 없다. 인천공항에서 모스크바까지 9시간을 비행한 후 다시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국내선으로 1시간 20분여를 더 가야 한다.

그 정도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도시 자체의 매력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최근엔 이곳에 가 볼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급락하는 루블화 때문이다. 얄궂게도 러시아의 위기가 여행자에겐 제정 러시아 시절의 정취를 그대로 체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소영 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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