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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진의 현장

입력
2014.12.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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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진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글일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영상)과 회화의 차이를 마술사와 외과의사의 차이로 설명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환자의 병을 고칠 때 마술사는 환자의 몸 위에 손을 얹고 주술을 왼다. 뛰어난 마술사일수록 환자의 몸에서 멀어도 신통력을 발휘한다. 반면 외과의사는 환자의 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야 한다. 전자가 대상과의 거리를 전제한다면, 후자는 거리를 없앤다. 화가는 마술사이고 카메라맨은 외과의사다. 뒤러가 묘사하는 투시도 그리는 법을 떠올리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화가는 화면 바깥에 서 있는 존재다. 이와 달리 카메라맨은 언제나 현장 안에 위치한다. 살인 사건 현장을 담은 그림과 사진이 나란히 있다고 상상해보자. 회화와 사진 모두 범죄 도구 같은 정보를 전할 수 있지만, 현장 안에 있는 느낌은 사진이 압도적이다. 설사 그림이 더 치밀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진가는 대상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 있다. 비록 사진 한 장을 담기 위한 시간은 100분의 1초에 불과할지라도 대상과 같이 호흡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컷을 건지기 힘든 법이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년ㆍ원제는 ‘확대’에 가깝다)은 사진의 현장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작가 토마스는 의뢰받은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공원으로 나가 셔터를 눌러댄다. 그러다 한 쌍의 연인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따라가며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나 토마스를 발견한 여자가 자신들을 찍은 필름을 집요하게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토마스는 다른 필름을 건네주고 급히 사진을 인화한다. 사진을 확대하자 누군가 권총을 겨누는 모습이 드러난다. 영화는 던지는 진실의 객관성과 예술의 의미 같은 철학적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화가를 주인공으로 세워서는 이 영화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반론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도 안토니오니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초점링을 돌려 초점을 맞춰야 하고, 현상과 인화를 거쳐야만 찍은 사진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필름값과 현상ㆍ인화비를 고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한 컷 한 컷을 조심스레 찍어야 했다.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이 모두가 옛이야기가 됐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예전의 사진작가들이 평생 찍은 컷수보다 더 많은 사진을 한두 달만에 찍을 수 있다. 자동초점에 초망원 렌즈를 갖추면 피사체가 처한 환경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밤을 낮처럼 바꿔주는 초고감도 카메라는 안토니오니의 고민을 우습게 만든다. 전자는 아해라는 이름으로 사진작가로 활동한 세월호의 실소유자 유병언의 사진이고, 후자는 김연아의 심야데이트를 찍은 파파라치 사진이다. 유병언의 사진은 근사한 자연 풍광을 포착했지만 묘할 만큼 공허하다. 루브르 박물관이 직접 관장하는 튈르리 공원과 베르사유 궁에서 대형 전시회를 연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에는 그리 눈여겨 볼 것이 없다. 자신의 방에서 축구장 20배나 될 만큼 넓은 금수원을 망원렌즈로 들여다본 그의 사진은 단조롭고 건조하다.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진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견하는 그 생생한 현장감이 그의 사진에는 없다. 한편 빛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피사체를 또렷하게 포착하는 초고감도 카메라는 파파라치에게는 축복이고 유명인에게는 저주다. 현장 증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파파라치의 야간 사진 앞에서 진실의 객관성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람의 눈에 보이느냐 마냐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전자제품이 된 디지털카메라의 기술적 진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카메라와 사람의 눈이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되고, 보지 못하는 것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다. 올해의 상품으로 꼽히는 셀카봉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선은 애교에 가깝다. 디지털 음악이 우리의 청각을 확장시켜주지는 못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시각은 날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디지털 사진의 미학과 윤리학을 알지 못한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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