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서 점령 이전 조선의 모든 제도, 문물을 폄하했다. 법도 그중 하나이다. 이른바 근대법 운운하면서 조선의 법들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았다. 그런데 일본은 정작 1889년 메이지헌법 반포 전까지 나라 전체에 시행되는 법 자체가 없던 후진국가였다. 일본이 헌법제정에 나선 것은 “외국과 조약개정을 추진할 때도 헌법이 없으면 문명국이 아니라며 대등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미요시 도오루ㆍ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ㆍ다락원 233쪽)이었다.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조약 개정을 요구하기 위해서도 헌법이 필요했다. 이때 일본 각지는 무사들이 자신의 영지(領地)를 사적으로 지배하는 도치(刀治ㆍ칼로 지배함)국가였다. 그래서 1882년경부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훗날 총리가 되는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이 헌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과 유럽 각지를 전전했다.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미국식 헌법이 일본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들은 유럽으로 건너갔다. 1882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예방한 이토 히로부미가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유럽에서도 의회 권한이 강한 영국식 헌법보다 황제 권한이 강한 독일식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현재 한국이 근대법 운운하면서 대륙법 정신을 따르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런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왕 메이지(明治)는 1889년 2월 11일 하늘과 역대 천황들에게 헌법을 고하는 헌법 발포식을 함으로써 비로소 헌법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날 메이지는 이세(伊勢) 신궁과 야스쿠니(靖國) 신사 등으로 사신들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메이지는 전통복장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각 총리대신에게 헌법을 하사했는데, 헌법이 국민에게 내리는 일왕의 선물이란 의미였다. 이 행사로 메이지는 허수아비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메이지 헌법을 하사받은 총리는 고종 13년(1876) 한ㆍ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당사자였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였다. 구로다는 1878년 3월 술 먹고 밤늦게 귀가하다가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병약한 부인을 칼로 찔러 죽였는데도 처벌은커녕 총리까지 된 것이다. 한마디로 법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인치(人治), 또는 도치(刀治)국가였다.
반면 조선은 물론 고려도 범죄 장소를 불문하고 동일범죄에 대한 동일형량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던 법치 선진국이었다. 구로다가 조선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교형(絞刑ㆍ교수형)이나 목을 베는 참형(斬刑)이었다. 게다가 고려ㆍ조선의 법률 적용 시스템은 지금 봐도 놀랄 정도로 엄격했다. 고려는 고려사 ‘형법지(刑法志)’가 법 정신과 체제를 설명해주고 있고, 조선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필두로 속대전(續大典) 등 여러 법전들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에서 법을 해석하는 관청은 중인들이 포진한 사율원(司律院)이었다. 형조ㆍ사헌부ㆍ의금부 등 사대부들이 포진한 수사기관에서 수사기록을 보내면 사율원에서 형법서인 대명률(大明律)과 해석서인 당률소의(唐律疏議), 율학변의(律學辨疑) 등을 뒤져서 형량을 조율(照律)했다. 조율이란 법률서에서 해당 형벌을 찾는 것을 뜻한다. 정확한 법조문인 정률(正律)이 없을 경우 가장 비슷한 법조문을 끌어다 안률(按律)했는데 이를 비의(比依), 또는 비율(比律)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의, 비율은 사율원이나 수사기관의 재량으로는 결정할 수 없고 형조를 통해서 임금의 재가까지 받아야 했다. 그만큼 엄격한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였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 신분까지 박탈한 것에 대해 헌법 또는 법률적 근거를 묻는 질문이 커져가고 있다.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한 최용기 창원대 법대 교수는 박한철, 이정미, 이진성, 김창중, 안창호, 강일원, 서기석, 조용호 등 8명의 헌법재판관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을 위반”했다면서 탄핵소추 의결을 국회의장에게 청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의 의원직 상실 주문은 “효력없는 헌재의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은 통진당의 그간 정치행위를 옹호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가 맞는지를 묻는 헌법 수호차원의 움직임일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의원직 상실 결정이 헌법이나 법률 몇 조에 따른 결정인지를 밝혀야 하고, 국회는 헌재가 삼권분립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 아닌지에 대해 답변해야 할 것이다. 이에 답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인치(人治)국가, 또는 자치(恣治ㆍ제멋대로 다스림)국가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으며, 그간 북한을 인치(人治)국가라고 비판해왔던 근거까지 상당부분 상실하게 될 것이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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