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 희생과 창조의 상징

유목적 인간의 진취성

집단과 합의의 가치 알아야

내일은 어린 양이 오신 성탄절, 그리고 일주일 후면 양들이 떼로 몰려오는 을미년이다. 새해는 청(靑)양의 해여서, 양띠 해 중에서도 특히 진취적인 한해라고 한다. ‘양(羊)’이라는 한자는 두 개의 뿔이 달린 정면 모습을 묘사한 상형문자다. 고대 지중해 문명을 열었던 크레타의 문자도 양을 ‘羊’으로 표기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뜻글자로서 ‘양’은 의미가 더 커진다. ‘상서롭다’는 형용사와 ‘배회한다’는 동사의 의미까지 갖고 있다. 아마도 양의 이미지와 행태를 미루어 부가된 뜻일 것이다. 양의 의미를 새해에 대한 화두로 삼아보자.

양은 희생이다. 제사 의식에서 제물로 바치는 살아있는 생명을 희생(犧牲)이라 했다. ‘희생양’이라는 관용어로 미루어 보듯, 양은 희생의 대표적인 동물이다. 특히 어린 양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의 상징으로, 오랜 예부터 최고의 제물로 꼽혀왔다. 예수를 “희생의 어린 양”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어의 ‘램(lamb)’은 생후 1년 이내의 양고기를 지칭한다. 1년을 넘기면 육질이 질기고 노린내가 심해서 식용으로는 부적합하다. 양의 자연 수명을 15년으로 볼 때, 고급 식탁에 오르는 양갈비가 생의 15분의 1을 채 못산 어린 생명이라니, 이처럼 가련할 수가. 가장 유명한 양은 최초의 복제동물, 복제양 돌리일 것이다. 그러나 돌리는 7살을 채우지 못한 채 안락사되고 말았다. 어린 양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류의 죄를 대신 구속하고, 인간의 식욕을 채워주고, 생명공학을 발전시켰다.

양은 상서롭다. 개나 돼지 같은 가축들은 먹거리가 사람과 비슷해서 인류의 식량을 위협한다. 그러나 순수 초식동물인 양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야생의 풀을 먹고, 고기와 양젖을 제공해 인류의 먹거리를 채워줬다. 뿐만 아니라 가죽과 털을 제공해 입는 문제도 해결했다. 충분한 초원과 약간의 보살핌만 있으면 거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는 이로운 동물, 주인을 물거나 해하지 않는 양순하고 순종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양은 최초의 유목 가축이 됐고, 유목 문화를 개척했다. 양이 없었다면 유목민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도 없었을 것이고, 양털이 없다면 모직공업에서 출발한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실크로드에는 유목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한 농경사회도 숱했고, 산업혁명에는 엔클로저 운동으로 농장에서 쫓겨난 유랑 농민도 많았다. 그러나 이 부정적 역사들은 양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양은 상서롭지만, 인간의 탐욕은 불순했다.

양은 배회한다. 먹이가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험난한 길들을 개척한다. 네팔 히말라야의 가파른 산록에도, 에티오피아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험준한 벼랑에도 양들이 만들어 놓은 길들이 있다. 사람은 물론, 다른 네발짐승은 도저히 오르내릴 수 없는 극한의 땅에도 지그재그로 좁고 가는 그들의 길을 통해 양들은 미지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 그 길들을 개척하면서 좇아가는 양들은 신중하고 조심스럽지만, 결코 멈추거나 뒤돌아서지 않는다. 양들은 결코 홀로 배회하지 않는다. 늘 무리를 지어 동료의 족적을 뒤따르며 이동한다. 따라서 양들의 배회는 개인적인 일탈이나 객기가 아니라, 집단적 합의에 의한 사회적 이동이다.

이 수동적 진취성, 사회적 이동성에 주목한 철학자들이 있다. 자크 아탈리는 ‘유목적 인간 (homo nomad)’의 개념을 제시했다. 유목적 인간이란 특정한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며, 공공성의 가치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인간상이다. 이들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창조형 인간, 박애형 인간이라고 했다. 유목적 인간은 공간적 이동을 직업으로 하는 여행가나 비즈니스맨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는 연구원이나 예술가는 한 장소에서도 지적 창조적 유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원, 공무원, 기능인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르게 살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현대의 ‘호모 노마드’이다.

양처럼 자신과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사회와 공동체에 유익하며, 새로운 창조와 실험으로 가득한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국가와 사회가, 우리 학교와 가정이, 그리고 내가 그리 되기를 소원한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ㆍ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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