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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무등산 타잔’ 박흥숙

입력
2014.12.2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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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전남 광주에선 제58회 전국체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광주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회에 참석한 김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에 들를 것으로 보고 연초부터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였다. 시는 아무런 이주대책을 세워놓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강제철거를 밀어붙였다. 무허가 토담집에서 가족과 살던 23세의 박흥숙은 그 해 4월 구청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 박씨는 예정된 철거일이 되자 순순히 살림살이를 뺐으나 철거반원들이 다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 등이 다치자 이성을 잃었다. 열쇠수리공을 그만두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던 박흥숙은 무술유단자 등이 포함된 철거반원들을 제압해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박씨의 소원은 가족들이 모여 사는 것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60일 동안 굶주려 가면서 집을 지었다. 흩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었고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에 각계 인사들이 ‘박흥숙 구명을 위한 회’를 꾸렸다. 이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고속성장의 그늘 아래 소외된 도시 빈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참극이라고 주장했다. 5ㆍ18구속부상자회 회원 김상집씨 등은 직접 사건을 취재해 월간지에 ‘무등산 타잔의 진상’이라는 르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은 “무당의 아들이 벌인 난동”이라며 사건을 왜곡했고, 3년 뒤 결국 사형이 집행됐다.

▦ 박씨가 숨진지 34년 만에 사건을 재조명하고 박씨와 철거반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어제 광주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아직도 박흥숙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김씨는 “유신 정부가 빈곤층에 가한 폭력으로 인한 민란이라는 의심이 많다”며 “박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혼자 십자가를 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씨는 최후진술에서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절규했다. 거대한 국가폭력에 희생된 박흥숙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있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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