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생산한 우유로 치즈 개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고급화
한국은 원유 생산량 조정에 급급
고부가 유제품 개발에 눈 돌려야
12월 한겨울 날씨에도 파릇한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풀을 뜯는 양떼와 그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잔잔한 수로, 안데르센 그림책에서 나올 법한 적갈색 벽돌집. 지난해 유제품 수출액이 67억 유로(약 9조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낙농업 대국 네덜란드 농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목가적 풍경의 이면에서는 농민들이 위기에 맞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는 모습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혁신과는 담을 쌓고 있는 우리 낙농가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직접 치즈 생산하는 우유 농가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주(州)에서 가족과 함께 25년째 젖소를 키우는 보크마씨 가족은 2009년부터 직접 생산한 우유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흰 우유를 낙농조합에 내다 파는 것보다 수익이 짭짤한데다 우유에 비해 치즈 가격이 안정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보크마씨 가족이 생산하는 유기농 치즈는 연간 12톤 가량. 지난해에만 20만 유로, 우리 돈으로 2억7,00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보크마씨는 “미국과 프랑스에 치즈를 수출하고 있다”면서 “자국 치즈에 자부심이 높은 프랑스에 수출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2008년부터 치즈를 만드는 시츠 더 용씨 부부는 치즈를 판 돈으로 40대 초반의 나이에 아이들 놀이터까지 딸린 근사한 2층 집을 갖고 있다. 남편은 소 젖을 짜고 부인은 치즈를 만드는데, 둥글 넙적한 모양이 마치 바퀴처럼 생긴 네덜란드 전통 고다 치즈에 샐러리나 마늘, 양파 등을 넣어 특징을 살렸다. 이들은 치즈에 ‘더 데일런’(De Deelen)이라는 브랜드를 붙여 직접 근처 치즈 가게에 내다 팔거나 도매상에 넘긴다.
치즈도 혁신이 중요
네덜란드 치즈농가는 기계적으로 치즈를 만드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다품종 소량 생산을 통해 고급화 전략에 안간힘을 쏟는다. 이웃에 덴마크 등 쟁쟁한 낙농업 국가가 포진해 있는 등 경쟁 환경이 녹록하지 않은 탓이다.
아버지인 헨리 빌리그씨가 1974년 암스테르담 근교에 만든 치즈 농장을 2대째 운영하고 있는 비베 빌리그(47)씨는 끊임없이 새로운 치즈를 개발한다. 햄 맛 치즈, 코코넛과 라벤더 맛 치즈, 그리고 최근에는 샴페인 맛 치즈까지. 빌리그씨는 “사장을 비롯한 전 직원들이 모여 시장이 어떤 치즈를 선호하는지, 어떤 치즈를 만들 지를 자유롭게 상의한다”고 말했다. 빌리그씨는 작년에 25개국에 치즈를 수출해 5,000만유로(약 682억원)의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렸다.
프리슬란트주 북동쪽에 위치한 비허르 카위컨씨 목장은 다른 목장과 달리 축사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젖소 대신 양젖으로 치즈를 만들기 때문이다. 낙농업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에서도 양젖으로 치즈를 만드는 농가는 40곳 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소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젖의 양이 훨씬 적어서다. 카위컨씨는 “사람들은 양젖이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만뒀지만, 나는 니치마켓(틈새시장)을 노렸다”고 말했다.
북쪽 바던해(海)근처의 벤 반 틸부르흐(39)씨 농장의 젖소들은 머리에 큰 뿔을 달고 있다. 좁은 축사 안에서 다른 젖소에게 상처를 입힐 우려 때문에 뿔을 제거하는 다른 농가들과 다르다. 또 여름엔 밤중에도 젖소들이 달을 보면서 들판을 노닐 수 있게 하고, 외부 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소를 자유롭게 풀어두기 위해 자동착유기 대신 수작업으로 젖을 짠다. 천체운행에 따른 농사력을 기초로 농업을 하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쓰기 때문인데, 이 인증 표시는 매출 증가에 톡톡한 효과를 내고 있다.
우유값 안정에만 초점 맞추는 우리 낙농업
반면 우리 낙농업은 아직까지 혁신이나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보다는 안정된 우유값에만 매달린다. 낙농진흥회가 생산량과 우유 값을 결정하면 모든 농가가 할당량만큼 생산하고, 그 가격대로 소득을 올리는 시스템이다. 안정된 소득을 올릴 수는 있지만, 그만큼 농가의 혁신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원유 가격은 ㎏당 1,050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이다. 물론 초원이 적어 사료값이 많이 드는 특성과 높은 인건비를 무시할 수 없지만 생산비 절감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문제는 이미 시장은 흰우유에서 유제품 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국내 1인당 흰우유 소비량은 2003년 38.3㎏에서 지난해 33.5㎏으로 점점 줄고 있는 반면 1인당 유제품 소비량은 2003년 62.5kg에서 지난해 71.3㎏으로 커졌다. 유제품 제조사들은 국산 우유 대신 값싼 수입산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지만, 국내 낙농업계의 대책은 원유 생산량 조정에만 머물러 있다. 흰우유가 남아도는 상황이 이어지자 낙농진흥회가 최근 ‘원유수급안정대책’을 내놓고 농가에게 원유 생산량을 줄이도록 유도하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한 낙농업계 관계자는 “나날이 시장 상황이 바뀌는데도 업계 전체가 낙농가 소득 안정에만 관심을 쏟고 있어 혁신다운 혁신이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글ㆍ사진 암스테르담ㆍ프리슬란트(네덜란드)=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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