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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얼룩, 주머니,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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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얼룩, 주머니, 수염

입력
2014.12.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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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공항이 있는 소도시에서 여백이 많은 책 한 권을 얻고, 참새를 닮은 애인에게 결별 통보를 받았다.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날이었고, 날씨는 마치 하와이처럼 청명하고 무더웠다. 물론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밥솥이었다. 팬암사 로고가 새겨진 미니 밥솥은 세상의 모든 빈티지가 그렇듯 실용성이 떨어졌다. 종종 밥물이 샜고 보온성도 좋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밥을 짓던 중 아예 전원이 나가기에 이르렀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밥솥만 꺼진 게 아니라 집 안의 모든 전원이 함께 나가는 바람에 두꺼비집 문제인 줄 알았다. 빌라 꼭대기 층에 사는 주인 할머니에게 말했고, 할머니는 즉시 수리공을 대동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가 가진 “어떤 제품의 문제인 것 같다”였다. 밥솥이 분명했다. 전원이 꺼진 게 밥솥의 클라이맥스, 그러니까 밥이 거의 되어 칙칙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밥솥은 애인의 선물이었다.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사 후 좀 뜸해지긴 했지만 불시로 닥치는 건 그녀의 취미 생활이었으니 늘 주의해야 했다. 애인은 밥솥 하나로도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괴로워할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선물을 임의로 버리거나 망가뜨렸다가는 오랫동안 시달릴 게 뻔하다는 소리다. 옷장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울거나, 비가 쏟아지는 한밤중 달리기를 하거나, 밥을 먹다 일어나 내 어깨를 깨물거나, 목욕하다 뛰쳐나와 불길한 모든 예감을 방언처럼 내뱉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그녀는 신경증과 성격장애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신경증이 있는 사람은 배려심이 과해 자신을 괴롭히고, 성격장애인 사람은 남을 괴롭힐망정 본인은 태연자약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신기하게도 이 둘을 한 몸에 아주 자연스럽게 장착했다. 오래 의심하다 쉽게 흥분하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문자에 바로 답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다쳤어?’로 시작해 ‘이제 내가 싫어진 거지, 그만두면 될 거 아냐’로 넘어가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직업은 바로 나의 ‘애인’인 셈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자신의 일상을, 그것도 자신이 원할 때만 시시콜콜 보고한 후 그 반응을 엿봤다. 내게도 같은 질문을 잊지 않고 한 후 기다리지도 않고 답변까지 스스로 마무리하는 게 그녀 하루 중요한 일과였으니 애인이 직업이라는 게 영 틀린 정의는 아니었다. 일례로 새벽 3시경 전화를 걸어와 잠긴 목소리로 “네가 열 살 어린 신부와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꿈을 꿨어”라고 말한 일도 있다.

그렇게 피곤한 여자를 왜 만나느냐고 묻는다면 크게 할 말은 없다. 롤러코스터의 맛이라고 하면 될까? 그녀에게 당하다 보면 식은땀이 나면서도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졌는데 그때 나오는 호르몬에 중독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녀는 재미있었고,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참새를 닮은 그녀는 작고 귀여웠으며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은 몰라도 새끼손가락 하나쯤은 ‘옛다’ 하며 뚝 떼어줄 것 같은, 전사-천사가 아니다!-같은 여자였다. 실제로 막다른 골목에서 큰 도사견과 마주쳤을 때 그녀가 우산을 펼치고는 그 개를 물기라도 할 듯 눈높이를 맞추고 으르렁거려 쫓아버린 적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몸이 좋았다. 함께 있을 때면 우리는 늘 찹쌀떡 반죽처럼 붙어있었는데 그때 오는 안도감은 더없이 부드럽고 꿈결 같은 것이었다. 우리 둘이 포개져 있을 때는 한 방울의 공기도 틈입하지 못했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애물단지 밥솥을 들고 동네 어귀에 있다는 ‘만물수리 박사’를 찾아 나섰다. 아스팔트에 신발 밑창이 눌러 붙을 것만 같은 뜨거운 날이었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끌고 언덕길을 내려갈 때 비탈길을 올라오는 아래층 남자가 보였다. 그는 전직가수였으며 이 빌라에 3년째 거주 중인 장기 세입자인 동시에 근처에 있는 ‘힐링 선 연구원’의 대표이사이기도 했다. 그는 전직가수답게 하와이안 프린트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자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성마른 표정이 갑작스레 환해져 도리어 내가 무안해졌다. 대표이사라기보다는 스튜어디스의 미소 같았다. 어색하게 인사를 거두고 그는 집으로, 나는 반대 길로 멀어져갔다. 그가 돌아설 때 셔츠 안으로 반짝거리는 금목걸이가 보였다.

공항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이 유니폼을 입지 않아도 스튜어디스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곧은 자세와 정갈한 걸음걸이 같은 것도 일조했지만, 대체로 미소가 비슷했다. 눈은 웃지 않고 입초리만 올라가는 그 미소 말이다. 공항에 취직했을 때 친구들은 스튜어디스를 실컷 볼 수 있겠다며 환호했지만 교육기간 내내 마주친 그녀들은 대부분 피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환히 웃곤 했는데 그 모습은 한결같이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 입매의 변화가 부자연스럽고 또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몸매까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걸 충분히 즐겼다. 정작 애인은 스튜어디스 따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근무처가 서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는 “어째서 입사하자마자 그런 한직으로 가는 거야? 이유가 뭐래?” 난리였다. 내 안위를 걱정하기 보다는 오직 멀어지는 게 싫은 거였다.

“거기 오래 다니면 미쳐.”

출근한 지 하루 만에 선배들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유령공항이라는 별명답게 청사는 어둡고 썰렁했다. 우리나라 국토 어디든 기차와 버스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국내 승객은 거의 없었다. 택시도 웬만해서는 들어오지 않았다. 상점 하나 없는 빈 청사를 걸으며 내 발걸음 소리를 듣다 보면 또 하나의 내가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텅 빈 공간에 나는 서서히 익숙해졌다. 우리는 점심시간이면 싸온 도시락을 풀거나, 다섯 명씩 한 조가 되어 자가용을 타고 근방의 음식점으로 나가곤 했다.

일이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검색 업무는 국제선 출국심사대에서만 이뤄진 데다가, 엑스레이 관찰은 3분 검색 후 1분 휴식이 원칙이었다. 용역 계약직임에도 불구하고 내막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신의 직장이라고 지칭하곤 했다. 하지만 일을 기다리며 검색대에 멍하게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있는 곳이 진짜 공항인지 다른 어떤 세계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게 정말 신의 생활이라면 누가 신이 되겠다고 나설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하네다, 나고야, 상해, 항주 등의 정기선으로 관광객이 들어올 때면 잠시나마 활기가 돌았다. 승객들은 입국과 동시에 곧바로 전세버스에 올라 인근 관광지를 경유해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손에 땀이 차서 밥솥을 바꿔들 때 문자가 울렸다. 애인이었다.

‘오늘 고모 기일이야.’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고모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콘서트 장 화장실에서 목을 매 죽은 사십 대 여자. 음산하면서도 코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 유명한 ‘에릭 클랩튼 공연장 자살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고모는 티얼스 인 헤븐을 라이브로 들으면서 죽고 싶어 했어. 그것뿐이야. 어차피 죽을 거였으니까 너무 비난하지 말라고. 진짜 억울한 건 뭔지 알아? 결국 그는 끝까지 그 노래를 라이브로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럴 바에는 집에서 음반을 틀어놓고 죽는 편이 나았다고 덧붙였다. 라디오 헤드는 크립(creep)에 대해 정말 크립(creepㆍ쓰레기) 같은 노래라고 공식석상에서 서슴없이 말한 일이 있고,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준 대표곡을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국내 가수들도 더러 있었으니 에릭 클랩튼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자신의 대표곡을 부르지 않은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위안 아닌 위안을 건넸더니 도리어 “그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자식을 잃고 만든 노래였으니, 다시는 부르지 않을 자격이 있다며 반박했다. 이런 식의 화법은 종종 사람을 미치게 했다. 기껏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 은근히 다시 반대선상에 서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쟁점을 세우고 대화하다 보면 뭔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남았다.

우리는 ‘빈티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됐다. 시험공부를 하던 때 포도주 라벨에 관해 검색하다 타고 들어간 사이트였다. 열성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재미가 있어 후에도 굳이 탈퇴하지 않았다. 아이디는 각각 ‘제익’과 ‘알렐루야’였는데 나는 제익이 ‘제이크 버그’를 뜻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새벽 4시. 제익과 알렐루야만 로그인이 되어 있던 시간에 ‘제익’이 왜 ‘할렐루야’가 아니라 ‘알렐루야’인지에 대해 말을 걸어왔다. 내가 ‘ㅎ’을 잘못 썼을 뿐이라고 하자 그녀는 ‘난 또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인 줄 알았지’라고 답했다. 할렐루야라면 몰라도 알렐루야에서 제프 버클리를 떠올린다는 게 좀 특이했다. 게다가 제이크 버그 ‘빠’라면 꽤 어릴 텐데 제프 버클리를 아는 것도 신기했다.

당시 제이크와 제프 중 누가 더 뛰어난 뮤지션인가 설전이 붙었는데 특이한 건 제익이 제프 버클리의 ‘소울풀’한 목소리에 찬사를 보냈고, 내가 제이크 버그의 천재성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비교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네요. 우리 둘 다’ 이런 식으로 대화는 지속됐다. 제프 버클리가 젊은 시절 익사한 것은 무서우리만치 그의 아버지, 즉 팀 버클리의 죽음과 닮았다는 말에서 엘리엇 스미스나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리고 히스 레저 같은 아티스트의 요절에 대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여자는 왜 그곳에서 죽은 것 같아요?’

밤이 깊어 피로해진 내가 어쨌거나 우리는 록의 후예든 아방가르드의 아들이든 보고 듣고 즐기면 그만 아니겠냐며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는 순간 제익이 건넨 말이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즉 에릭 클랩튼 공연장 자살 사건에 관해서였다. 가십에 솔깃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서 그 여자에 대해 좀 아느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제익이 먼저 그녀가 자신의 고모라고 밝혔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허풍과 농담으로 점철돼 있었지만, 그리고 거짓말일수록 디테일했으므로 반신반의했지만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혈관이 급속도로 부풀어 터져버리는 희소병이 집안 내력인데 발병하면 무서운 속도로 진전된다고. 불치병이라 고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말끝에 자신도 결국 고모와 같은 길을 가게 될 거라고도 했다. 죽음은 가깝고도 멀었지만, 글쎄.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제익’에 대한 당시의 인상은 자신을 극도로 불안한 상태로 밀어 넣고, 그 상태를 약간은 즐긴다는 정도였다. 훗날 내가 ‘고모님이 남긴 유서는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우리 고모는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유서였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집요했지만 결론은 빨랐다. 오랜 채팅으로 혼미해진 내가 ‘사실 제이크 버그를 꽤 닮았다’고 우기게 됐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장 만나야겠다며 집 근처로 찾아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간 자리에는 초등학생 같은 여자가 우비에 장화까지 신고 서 있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우산을 지팡이처럼 들고 등에는 기타를 메고 있었다. 자라다 만 것 같은 전체적인 인상이 적어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낱낱이 살피더니 “좋아. 그렇게 말하는 걸 허락해 주지”라고 말했다. 제이크 버그를 닮았는지 살핀 것이었다. 갈 곳 없던 우리는 편의점을 향했고, 각각 취향에 맞는 라면을 골랐다. 나는 참깨, 애인은 새우. 나란히 서서 라면을 후루룩 먹을 때 편의점 창문에 나란히 비친 우리 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우주 속을 떠돌던 반쪽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건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다.

라면을 다 먹어갈 때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낄낄거리면서 이 보라고, 자신은 날씨를 조종한다며 의기양양해했다. 그리고 우산을 씌워준다는 핑계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줬고, 기꺼이 방에 따라와 가방에서 우쿨렐레를 꺼냈다. 그녀가 작아서 기타인 줄 알았다. 그녀는 비 내리는 새벽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허밍 했다. 나는 오키나와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오키나와에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열심히 연주하며 둥근 머리통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TV 다큐에서 본 아기 참새의 고갯짓을 떠올렸다. 그 후로 언제든지 참새를 보면 애인이 떠올랐다. 작고, 분주하고, 빠르게 날아올랐으며 시종일관 짹짹거렸지만 겁이 많았다.

‘너는 우쿨렐레를 들으려고 나를 만나지? 나는 너를 만나려고 연주를 하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다 나온 기분이 들어. 숨을 참다 보면 눈물이 나. 그럴 때 나는 네 얼굴이 떠올라.’ 그녀의 문자는 과장 좀 보태자면 두 걸음에 한 번씩 쏟아졌고, 그때마다 나는 밥솥을 내려놓고 답변을 보냈다. ‘사는 게 능숙해진다면 너무 슬플 것 같지 않아?’ 이런 문자에도 고작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텍스트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문자를 보내며 걷느라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언제 왔는지 전직가수가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얼른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쳤다. ‘만물수리 박사’에 들르는 걸 깜빡했다고 했다. 반가웠지만 밥솥 때문에 누전됐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챌까 봐 설명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그가 밥솥을 빼앗듯 들고 통화를 하라며 배려해줬다.

“네가 이사했을 뿐인데 어쩐지 우리 연애의 1단계가 끝난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2단계가 있을까?”

전직가수의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바라보며 묵묵히 애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착 올라 붙은 엉덩이를 바라보며 나는 사람의 엉덩이가 숫자 3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울고 있어. 정말이야. 나는 그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

드디어 신경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고모가 보고 싶어.”

애인은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둘 다 말이 없었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재밌는 얘기 해줄까?”

일단 애인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녀는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장대소했고 내가 왜 웃느냐고 묻자 “재밌는 얘기할 거라며. 그래서 미리 웃었어.”라고 답했다.

수사슴 얘기를 꺼냈다. 암컷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는 뿔이 클수록 유리한데, 정작 그 뿔 때문에 숲을 지나다 나무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시시껄렁한 동물 백과였다. 공항 2층 청사 코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비치된 그림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얘기를 들은 그녀는 잠시 조용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슬픈 얘기인 걸.”

전직가수를 따라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갔다. 아직도 이런 골목이 남아 있다니 신기했다. 골목이 끝났나 싶으면 다시 새로운 골목이 나왔고 이제 그만 걷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벽화가 나타났다. 하늘색 외벽에는 얼룩말 벽화가 있었고 한낮의 햇살이 말의 엉덩이를 비추고 있었다.

전화기를 댄 귀에서는 땀이 흘렀다. 애인은 내게 어디를 가는지 물어와 공항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는데 “앞에 보이는 간판을 읽어줘”라고 해서 당황했다. 어물쩍거릴 때 그녀가 “내가 먼저 말할게. 내 앞에는 지금 웃음 연구소라는 간판이 있어”라고 말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 와중에 만물수리 박사에 도착했다. 상점 크기에 비해 간판이 거대했는데 아인슈타인을 닮은 콧수염 캐릭터가 우리를 반겼다. 만물수리 박사 내부는 작지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간판에서 튀어 나온 듯한 주인장은 낮에는 수리하고 밤에는 아무도 몰래 발명을 하는 숨은 천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전직가수를 보자 연락을 못 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일단 내 밥솥을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팬암이네요. 끔찍한 사고였죠.”

밥솥에 새겨진 로고를 보고 중얼거렸다. 사라진 브랜드를 찾아 새롭게 런칭하는 게 한동안 유행이었는데, 그때 재탄생한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팬암이었다. 최고로 잘 나가던 항공사에서 지상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항공 사고의 대명사가 된 비운의 브랜드. 왜 밥솥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라고.”

애인은 그렇게 말하며 밥솥을 내게 안겼다. 그녀는 변화무쌍했다. 건강염려 시즌에는 1960년대 미국식 가정용 건강박스를, 취업했을 때는 런던에서 입수했다는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도시락통을 보내오기도 했다.

밥솥은 접합문제였다. 만물수리 박사는 겉모습만 옛날 거지 부품은 다 새것이라 고치기 수월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리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전직가수에게는 좋지 못한 소식을 전했다. 뒤돌아 진열장에서 구형 녹음기를 꺼내 내밀었다.

“도저히 고칠 수가 없어요.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전직가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래된 제품이라는 게 만물수리 박사의 변명이었다. 전직가수와 나는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내가 수리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면, 그는 녹음기 때문에 상심해서였다. 전화가 또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좁은 공간이라서 애인의 목소리가 샐 것도 같았고 조금은 귀찮기도 했다. 또 시시콜콜 물어볼 텐데 전직가수 앞에서 전직가수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다들 듣는데 뻔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그때 전직가수가 일어났다. 옆 카페에 가서 기다리자며 나를 이끌었다.

“어머니인가 보죠?”

전직가수가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에 대한 질문이었다. 숨길 일은 아니지만 자랑스럽지도 않아 모깃소리 만하게 여자 친구요,라고 대답했고, 나도 모르게 “자꾸 죽겠다고 하네요. 물론 한 번도 죽은 적은 없지만요” 발설했다. 통화가 길어진 데 대한 변명이었다. 아이스커피가 담긴 유리잔에 방울방울 맺힌 물방울이 하나로 합쳐져 주룩 흘렀다.

“그 또래 여자들이 죽겠다고 하는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죠.”

그 말이 거리감을 좁혀줬다.

“무도거언 달해줘요.”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는 그의 볼이 불룩했다.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더니 양 볼이 불룩한 채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머쓱해졌다. 나는 그의 작은 가죽 손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색대 일을 하면서 타인의 가방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안을 투시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내 시선을 좇아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힐링 선 연구원의 리플릿이었다. 문득 대학 때 친구를 따라갔던 정체 모를 종교 및 경제 집단이 떠올랐으며, 그를 아무 의심 없이 따라 카페까지 온 게 후회됐다. 나는 그저 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소리가 나도록 쭉쭉 빨아댈 뿐이었다. 입 안이 얼얼했다.

부채처럼 펼쳐진 리플릿에는 힐링 선 연구원 소개와 연혁과 여러 프로그램이 나열되어 있었다. 디자인이 조악해 한글도 외국어처럼 보였다. 유기농 레스토랑이나 기체조와 트레킹, 명상요법, 디지털과의 작별 등의 프로그램을 읽다 보니 한 번쯤 체험해보고 싶어졌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넘어가면 안 돼. 리플릿을 넘기니 ‘인기 한류 가수와 함께 하는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시간’이라는 글귀와 함께 그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힐링 선 연구원 이사라는 직함도 있었다. 대표이사라는 말은 와전된 것 같았다. 대표곡 ‘오케이 유턴’ 부분에서 내 눈길이 멈추자 그는 얼른 리플릿을 거두며 말을 바꿨다.

“보안검색요원이라고요? 왜 그 외국 나갈 때 오줌 지리게 만드는 제복 입은 양반인 거죠?”

웃기지도 않은 말을 하고 혼자 껄껄 웃더니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저는 그쪽은 아니고 짐 검사하는 팀입니다.”

말한 후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다 그만뒀다. 어차피 서로 영역이 달랐다. 입사하면서 정말 많은 직업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세상에는 선생님, 의사, 디자이너, 대통령 말고도 수많은 일꾼이 필요했다. 공항 안에도 무수히 많은 직군이 존재했다. 나처럼 검색대에 앉아서 타인의 가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한겨울 활주로를 누비며 눈을 치우고, 다른 누군가는 관제탑에 앉아서 신호를 보낸다.

물론 놀고먹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애인의 또 다른 직업은 ‘부자’였다. 처음 그녀에게 직업을 물었을 때 그녀는 쿨하게 ‘부자’라고 답했는데,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뇌리에 박혀버렸다. 부자가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애인은 이후에도 늘 스스로 자신이 부자라고 강조했지만 어디로 봐도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빈곤해 보이는 인상에 가까웠다. 그녀의 첫인상은 우산 팔이 소녀였으니까. 애인은 이런 내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증조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빈티지 셔츠에 아델이 입었던 진을 입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래된 기차역에 가는 거야. 그리고 그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에 줄을 서서 찐빵을 딱 한 개 사 먹고 돌아가는 거. 그런 게 진짜 부자지.”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아델의 바지 속에 그녀가 들어간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났다. 어쨌든 그녀는 “부자일수록 일은 더 필요해”라고 자주 말했다. 실제로도 끊임없이 바빴다. 한 번은 빈티지의 대세가 런던에서 시드니로 옮겨졌다며 보름씩이나 훌쩍 혼자 쇼핑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고는 장기여행으로 인해 공황장애가 왔다며 한 달 넘게 병원에 다녔고, 그 상담의사에게 수입해 온 빈티지 제품을 팔기도 했다. 그렇게 남긴 돈으로 내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선물을 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그녀의 행동반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벽에 걸린 액자와 밥솥을 헐값에 사오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는 전직가수처럼 공항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가이드도 있는 것이다. 그는 십여 년 전 OST 작업에 참여했던 드라마 ‘오케이 유턴’이 외국에 방영되며 인기를 끌면서 뒤늦게 해외 팬이 꽤 생겼다고 리플릿을 접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류 붐이 한창일 때는 일본 지방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인기가 가라앉을 무렵 중국 쪽 관광객을 상대로 여행 패키지가 개발됐다.

“소형 항공사 알죠? 코리안 이글스라고, KE. 거기서 중국을 뚫었어요.”

그날도 전직가수는 중국인 관광객 한 팀을 선 연구원에 안내하고 오는 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기에는 늙어 보였지만 관광객의 연령에 따라 얼마든지 젊은 청년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어쨌거나 한 공항을 기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자기 일이 기본급이 형편없으며, 관광객 머릿수에 따라 성과급을 받아 들쑥날쑥하다고 투덜댔다.

“독립하시면 어때요? 전망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내가 짐짓 비즈니스맨처럼 말했을 때 그가 느닷없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움켜쥐었다. 기습적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가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곧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런. 마흔 중반의 혼자 사는 남자. 게다가 가수 출신. 결혼한 적도 없는 듯했다. 집에 여자가 드나드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나이에.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애인이 있다고 말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전화가 울렸지만 받을 수 없었다. 축축한 손바닥의 감촉이 뺨에 계속 들러붙어 있었다. 이건 뭐지. 차라리 ‘선을 아십니까’가 나을 뻔했다. 얼음을 오독오독 씹지도, 그렇다고 뱉지도 못한 채 나는 내 볼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뺨의 시간’을 보냈다. 중년의 남성이 청년의 뺨을 만지고, 청년이 놀라고, 둘이 각자 자신의 뺨을 쥐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놀랐죠. 정말 미안해요. 별 뜻은 없습니다. 막내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머뭇거리더니 금줄로 된 목걸이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사진으로 된 펜던트가 걸려있었다. 앞면에는 바가지 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다른 면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의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녹음기에… 동생이 들어있습니다.”

그에게는 열세 살 아래의 동생이 있었다. 그가 맏이였고 가운데 여동생이 둘, 그리고 막내였다. 그가 기타 숍을 운영하면서 간간이 음반 작업을 하며 지낼 때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동생 반 아이들 여럿이 한 아이를 때렸고, 그 와중에 동생이 급소를 친 모양이었다. 우연히 패싸움에 휘말렸는지, 고의적으로 그 애를 왕따 시킨 건지, 혹은 동생이 왕따를 당한 건지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고 했다. 전화가 걸려왔고, 너무나 순진하게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 같다고 울먹거리던 동생의 목소리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라고 했다. 별일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아이들의 싸움은 그렇게 비극으로 종결됐다. 그리고는 죄인의 가족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죗값을 치르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미련한 짓이었는데, 도피시켰어요. 일본으로 보냈어요. 돈도 보내주고 저는 몇 번 직접 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끊겼죠.”

도망시킨다는 것 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동생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그때부터 신분증 한 장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설사 그가 당시 동생 곁에 있었다고 해도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동생보다 어른이었지만 누구나 인생은 처음 살아내는 것이니 말이다. 세 번째 일본에서 만났을 때 자신보다 더 노회한 동생의 눈동자를 봤다고 했다. 그날 이후 동생은 사라져버렸다.

“그 후 두어 번 여동생에게 연락이 더 왔다고는 하더라고요. 처음엔 하얼빈이라고. 그 다음에는 자기를 찾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게 벌써 칠 년 전이었다. 울음을 참느라 그런지 그는 안색이 붉어졌다.

“우린 너무 가난했어요… 무지했죠… 그 애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막내의 얼굴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나는 모릅니다.“

일본의 한 공연장 무대 위에서 눈이 빠져라 동생을 찾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더 유명해져서 동생이 자신을 찾아오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사연은 있다. 애인이 빈티지 사업을 하는 까닭이나 내가 공항에서 일하게 된 이유 그런 것들은 켜켜이 쌓인 각자의 인생의 결과물인 것이다.

아버지가 트렁크를 끌고 오면 엄마는 달뜬 얼굴로 아버지를 맞이했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비누방울을 불며 놀았다. 비누방울 놀이가 좋았다. 숫자 0과 닮아있는 그 방울들이 공기를 뚫고 날아오르다가는 툭 하고 터져버리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얇은 점막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궁금했지만 나는 금세 잊고 또 새로운 0을 만들었다. 불기만 하면 끝도 없이 생겨나는 0들. 깜깜해질 때까지 불고 또 불면 눈과 귀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 아버지가 다시 트렁크를 끌고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는 더 이상 비누방울을 불지 않아도 됐다.

전직가수의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녹음기는 그 자체로 동생만큼의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것이란 그렇다. 녹음기에는 어떤 노래가 들어 있을까. 노래가 아니라 무의미한 음성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루까루까루까 끼루끼루끼루’ 같은 소리. 누구나 어린 짐승이었던 그 시간의 소리 말이다.

“안면이 있다고. 오래 붙잡았습니다. 처음 뵐 때부터 동생 생각이 나서…”

그러더니 언제 침울했느냐 싶게 호탕하게 웃으며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작업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더 어색했다. 그나마 형이라고 불러, 하며 어깨동무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카페 주인이 테이블에 와서 안부를 전하자 전직가수는 더더욱 오버했다. 터줏대감은 오래된 비밀을 ‘나’라는 웅덩이에 묻고 현실로 돌아온 듯했다. 주인은 커피가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고는 선물이라며 작은 노트를 하나 내밀었다. 개업 때 만든 건데 아직 남아 가끔 손님에게 나눠 준다고 덧붙였다. “개뿔. 쓸데없이 책은.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주려면 커피나 더 주라고.” 전직가수는 잔으로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고는 서둘러 목걸이를 채웠다. 동생의 사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셔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책은 시시했다. 얼룩말과 캥거루 그리고 새우의 윤곽이 빗금으로 그려져 있는 일종의 아트북이었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면 백마에서 얼룩이 생겼다가 흑마로 변했고, 캥거루 배의 주머니가 사라졌나 나타났다 반복됐다. 새우도 마찬가지였다. 수염이 한 줄 두 줄 생겼다가 다시 사라지곤 했다. 얼룩과 주머니와 수염이 자유롭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책을 나는 앞뒤로 스르륵 스르륵 넘길 때 만물수리 박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주인을 붙잡고 떠드는 전직가수를 두고 카페를 나섰다. 밥솥을 찾아 들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벗어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애인에게는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문자를 먼저 확인했다.

‘예전에도 사실 나는 같은 곳에 있었어. 널 알기 전에는 혼자였지만. 사랑이 기념품이 아니란 걸 알아. 이제 널 떠나줄게. 할렐루야.’

보나 마나 또 어디선가 본 노래 가사거나 시를 짜깁기했겠지만 그녀의 감정 표절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애태우고, 슬퍼하며 진심으로 붙잡았다. 어쩐지 그녀의 그런 말들이 비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유일했던 가족을 놓쳐버린 과거가 떠올라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애인이 저러다가도 또 아무렇지도 않게 “여태까지 내가 한 말은 몽땅 잊어줘. 그럴 거지?” 하면서 내 등을 타고 기어오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밥솥을 든 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애인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결국 스무 번쯤 시도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사실은 밥솥이 고장 났었다고, 그러나 이제 고쳤다고 고백했다.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빈티지는 그게 맛이니 다른 상상은 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이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취직도 했고, 더 이상 엄마는 필요 없잖아.”

그녀는 많이 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필요해. 나에게도, 네게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밀인데, 사실 나…. 삼백 살이야. 네가 아는 것보다 나이가 좀 더 많다고. 시간이 지나면 네 피를 빨아먹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만 헤어져. 이제 어린 인간 여자에게 가라고.”

그녀다운 이별 통보였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거짓말처럼 연락을 끊었다. 그녀가 자주 꾼다는 물속에 갇힌 꿈을 나도 처음으로 꾸었다.

그날 나는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애인에게 결별 통보를 받았고, 이웃인 전직가수의 사연을 얻었으며 얼룩을 벗은 얼룩말과, 주머니를 잃은 캥거루, 수염을 자른 새우를 만났다.

고쳐온 밥솥을 사용한 건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였다. 날씨는 어느덧 선선해졌고 해도 빨리 지기 시작했다. 밥솥은 전보다 더 요란하게 칙칙 소리를 내며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밥솥을 보니 그녀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애인은 증발해 버렸고 나는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언제나 몸이 먼저 굳었다. 엄마가 쓰러져 있을 때도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게 전부였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 나였다. 엑스레이로 가방을 투시하듯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뭐라도 좀 달라졌을까.

밥솥이 제 일을 하게 두고 거실 한쪽 구석에 앉아 카페에서 받은 책을 들어 거꾸로 펼쳐보았다. 이번에는 흑마가 얼룩말이 되었다가 다시 백마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밥솥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김을 뿜으며 기차처럼 내달리던 밥솥은 순간 제 힘에 못이기는 듯 펑하고 꺼졌다. 순식간에 갑자기 집안의 모든 전원도 함께 나가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과 고요 속에 꿀렁꿀렁 넘치는 밥물 소리만이 퍼졌다.

집 안에는 밥의 온기가 퍼졌고 급속도로 허기졌다. 어디선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와 애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컴컴한 가운데 사슴 한 마리가 보였다. 한없이 위대하고 싶은 수사슴은 뿔이 나무에 걸려 오도 가도 못했다. 오래도록 울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도 이처럼 깜깜한 가운데 홀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검은 실내에서 귓가에 울리는 우쿨렐레 연주 소리에 맞춰 조용히 읊조렸다. 알렐루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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