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14년에 걸친 민족해방(NL)계 진보 정당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민중민주(PD)계, 참여계 등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한때 10석 이상의 의원을 배출하고 제1야당과 연대하며 정치판을 흔들기도 했으나, 끊임없는 종북 시비와 패권 논란으로 진보 진영 내에서도 따가운 눈총을 받다가 결국 헌재에 의해 제도 정치권의 무대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민노당 창당과 NL계 당권 장악
통진당의 역사는 2000년 1월 PD계와 민주노총 세력을 중심으로 출범한 민주노동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대표를 지낸 권영길을 필두로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 등이 초기 당의 터전을 닦아놓자,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NL계가 2001년 9월 이후 대거 입당해 민노당에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NL계 활동가들이 충북 괴산군 군자산에 모여 정당 참여를 결의한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이 계기였다.
민노당은 2002년 6월 지방선거 때 기초단체장 2명 등을 당선시키며 첫 성과를 보였고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해 첫 원내진출의 꿈을 이뤘다. 권 전 대표와 심 의원, 노 전 의원도 이때 원내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후 NL계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PD계와의 주도권 다툼이 본격화했다. 이석기 의원 등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인 NL계는 총선 직후인 2004년 5월 치러진 1기 최고위원 선거에서 PD계를 누르더니, 2006년 1월 치러진 2기 선거에선 당 대표ㆍ정책위의장ㆍ사무총장 등 당 3역을 휩쓸었다. 이 과정에서 NL계는 당비 대납ㆍ불법 지구당 창당ㆍ위장 전입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비난을 사기도 했다.
2006년 10월에는 NL계 당직자가 연루된 ‘일심회’ 사건이 적발돼 2007년 12월 대법원 판결이 확정했다. 이에 PD계 주도로 2008년 2월 임시 전당대회에서 ‘일심회 연루자 제명 안건’이 상정됐으나 NL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북핵 등 대북 문제를 두고 NL계와 견해 차를 드러낸 PD계는 결국 3월 당권파(NL)를 ‘종북’으로 규정한 뒤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통진당의 탄생과 분열
PD계의 탈당으로 NL계만 남은 민노당은 이후 당세가 급격히 위축됐으나,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진영 통합 움직임이 불면서 다시 활로를 찾았다. 2011년 12월 유시민 전 의원과 천호선 정의당 대표 등 참여계 및 진보신당 탈당파와 합쳐 통합진보당을 창당한 것이다. 통진당은 특히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과 야권연대를 이뤄내면서 2012년 4ㆍ11 총선에서 사상 최대인 13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비례대표 경선 부정 파문이 터져나오면서 당은 다시 사분오열했다. 당 진상조사위는 비례대표 경선을 총체적 부실로 인정했으나, 당권파였던 NL계가 격렬하게 반발하며 당 중앙위에서 비당권파에 대한 폭력 사태까지 일으켜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NL계의 수장으로 꼽힌 이석기 의원이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뜩이나 북핵이나 3대 세습에 대해 일체의 비판 논평을 내놓지 않아 끊임없이 종북 의심을 받던 상황에서 불을 지핀 것이다.
같은 해 7월 이석기ㆍ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안이 의원총회에서 최종 부결되자 민주노총이 지지를 철회했다. 이어 9월에 참여계와 진보신당계가 탈당해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창당하면서 통진당은 다시 NL계만의 정당으로 전락했다. 통진당은 10월 18대 대선 후보로 이정희 전 대표를 내세웠으나 그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말만 남긴 채 자진 사퇴했다.
NL계만 남게 된 통진당은 2013년 8월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실을 ‘내란음모 혐의’로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의원이 지하혁명조직(RO)에서 “전쟁을 준비하자”고 말한 녹취록이 공개되는 등 파장은 커져만 갔다. 결국 이 의원은 국회의 체포동의안 가결과 함께 법정 구속됐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11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안’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헌재에 제출했다. 이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이 당 해산의 직접적 원인이 된 셈이다. 한때 진보정치의 희망이었던 민노당-통진당은 NL계의 브레이크 없는 폭주로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임준섭기자 ljscogg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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