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리치 지음ㆍ이윤진 옮김
열린책들ㆍ320쪽ㆍ1만2,800원
영미권의 서사문화에는 다소 유치하지만 사랑스러운 상상력이라는 게 있다. 서사예술에서 유치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함정이지만 그쯤은 간단히 분쇄해버리는, 개연성이라는 중력의 법칙을 가뿐이 무시해버리는 이 서사들에는 유머와 위트로 무장한 특유의 따스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이 문화권에서 하나의 장르로 뿌리내린 것이어서, 그 장르의 자장 안에서는 현실주의 지향이 강한 한국어 독자도 고분고분해진다.
미국 시사 코미디 프로그램 ‘SNL’의 최연소 작가 기록을 가진 사이먼 리치(사진)의 장편소설 ‘천국주식회사’는 천국이 하느님을 전문경영인으로 하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인간들 중 특채된 이들이 천사가 되어 40년을 연한으로 근무중인 이 주식회사는 급여와 복지 수준이 매우 높으며 직급 간 위계와 부서간 업무 분장 및 경쟁도 확실하다. 문제는 CEO인 하느님이 전쟁이나 기아, 자연재해 같은 인간 운명에 중요한 사건들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스포츠 경기 중계와 골프 라운딩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왕회장님’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다.
사달은 인간을 위해 크고 작은 기적을 제조해내는 기적부 소속 신참 계약직 천사 일라이자가 보다못해 입바른 소리를 쏟아내면서 난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하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여기 계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왜 일하러 나오시는 거죠?” 당돌한 일라이자의 말을 들은 하느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반성한 후 폭탄선언을 한다. 가망이 없는 행성 지구를 30일 후 폭파시키고 CEO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는 것.
일라이자와 그녀를 연모하는 기적부의 천사 크레이그는 하느님의 이 과격한 결정을 철회하기 위해 기적 하나를 만들어내기로 계약한다. 서로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데이트 한번 못한 연애 젬병에 쑥맥인 샘과 로라가 30일 안에 입을 맞추면 지구는 종말을 피할 수 있다.
30일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해 최후의 심판 25분 전까지, 천사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닿을 듯 닿을 듯 빗나가는 두 남녀의 모습이 뜻밖에도 아슬아슬하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작가의 살아 펄떡이는 입담 덕분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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