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하릴없이’라는 말을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딱 보고 20세기 중반에는 ‘할 일 없이’라는 표현을 ‘하릴없이’라고 썼구나 생각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딘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몸뚱이는 네댓 살박이만큼도 발육이 안 되고 그렇게 가냘픈 몸 위에 가서 깜짝 놀라게 큰 머리가 올라앉은 게 하릴없이 콩나물 형국입니다.” 문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할 일 없이 콩나물 형국”은 아닌 것 같았다. 풍자와 조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말이다. 혹시나 하고 국어사전을 펼쳐 ‘하릴없이’의 뜻을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릴없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첫 번째 뜻은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였고 두 번째 뜻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였다. ‘태평천하’에 쓰인 ‘하릴없이’는 아마도 두 번째 뜻에 가까울 것이다. 단어의 뜻을 모를 땐 하릴없이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평생 하릴없는 학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온종일 ‘하릴없이’라는 말을 어떻게 대화에서 사용할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릴없이’와 ‘할 일 없이’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할 일이 없으면 하릴없어지고, 하릴없으면 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직까지도 ‘하릴없이’라는 말을 사용할 기회를 벼르고 있다. ‘하릴없이’가 하릴없이 내 말이 될 그 순간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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