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요구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잘 다듬어진 논리나 유창한 언변이 필요 없다. 그냥 가진 것을 지키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토론, 협상, 합의는 늘 변화를 요구하는 자의 몫이다. 가진 자는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혹시 하더라도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준에서의 반응이면 족하다. 지난 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이런 구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1년이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함께 이끌어나가겠다는 공약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정권이 처음 1년은 호흡을 가다듬고 준비하는 과정을 갖는 줄로 이해하려고 했다. 사회서비스 전달체계 확대를 시도했고 고용복지센터도 만들었다. 그래서 뭔가 하려니 싶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경제민주화는 단어 자체가 사라졌고 ‘무상복지’ 논쟁을 오히려 도발하면서 복지제도 확대의 필요성을 지자체와 중앙정부 간 밥그릇 싸움 차원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온갖 정치적ㆍ사회적 이슈에는 침묵과 법적 고소로써 대응하고 있다.
법이 무엇인가? 학교에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며 규범이다”라고 배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법적 다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회가 추구하는 윤리, 규범, 도덕적 이상, 철학적 가치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나에게도 문제가 없다”는 개인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낮은 수준의 도덕일 뿐이다. 특히 한 사회의 지도자라면 법적 소송에 매달릴 것이 아니다. 윤리와 철학, 정치적 판단에 근거한 토론과 논쟁 과정에 당당하게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편을 설득하기도 하고 또한 자신이 설득당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희망을 갖고 살만한 지속가능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사회에서 사회복지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굳이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1970~80년대 식 건설업ㆍ부동산 경기 활성화 기반 성장은 한국 경제에서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과 성장없는 고용’이라는 후기산업사회의 모순적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ㆍ지식정보 산업 분야 기업은 더 이상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용없는 성장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성장없는 고용’ 현상도 관찰할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돼 있는 상황에서 노인과 중년여성들이 취업시장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빈곤 문제에 빠져있고 여성들은 남성 홀벌이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래서 성장없는 고용은 아파트 경비원과 식당 아주머니로 대변되는 비공식 부문, 질 낮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진다. 고용률 70%를 달성한다 할지라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다. 기업은 다른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대다수 대중은 더 이상 은행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자’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용없는 성장이든 성장없는 고용이든 고용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복지제도 자체가 발전할 수 없다. 복지제도 발전의 토대로서 재원은 기업과 근로자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성장에 비례한 고용 창출을 하지 않고, 근로자는 끊임없는 고용불안 속에서 낼 세금도 없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무엇으로 사회복지제도 확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더 늦기 전에 경제민주화와 병행하는 사회적 경제 기반 사회복지제도 확대를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2년 동안 우리는 경제민주화보다는 개발독재시대식 부동산과 건설업 부양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별적ㆍ파편적 복지가 판치는 세상을 보았다.
변화에 대한 요구에 침묵과 고소로써 대응하면서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의식의 분열을 방치하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상황에서 사회복지제도라고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이미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공무원 연금개혁, 의료서비스의 영리 민영화 저지, 무상급식 사업 방식의 합리적 재검토, 공공 보육서비스 확대,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 등 쌓여만 가는 현안은 사회적 관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진 자의 사회복지가 ‘적당히 살다가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아니라면 침묵과 고소에서 벗어나 변화의 요구에 답을 할 때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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