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
법정스님의 유명한 수필 ‘무소유’는 마하트마 간디의 이 말로 시작한다. 스님은 이 글에서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설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욕은 마치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 중 하나가 집에 대한 소유욕이다. 한겨울 추위와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에 대한 욕망은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 세포 속 유전자에 새겨진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일까. ‘내 집’에 대한 욕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성장을 자극하는 주요 동인 중 하나로 작용해 왔다. 어느 나라 어떤 정부든 국민의 소유욕과 투기욕을 자극하며 건설경기를 활성화하는 것은 경기를 부양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에게는 내 집 마련의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거주할 집은 필요하지만 그게 반드시 내 소유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의다. 사상 최저 금리인데도 이전 세대처럼 굳이 빚 내서 집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선 Y세대, 또는 밀레니엄 세대(millenials)라 불리는 20~30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월간지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은 “새 차와 집을 원하는 열망이 2차 대전 후 경제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밀레니엄 세대는 둘 다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들을 ‘가장 인색한 세대’(cheapest generation)로 명명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70%를 넘어 80%에 육박하는데도 집을 사지 않는다. 20대~30대 초반인 후배들에게 “몇 살이 되면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어보면 “집을 왜 사야 하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처음부터 이 세대가 무소유를 추구했을 리는 없다. 소유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소유할 수가 없어서 욕구조차 거세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 경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대침체에서 서서히 회복돼 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취업이 녹록하지 않다. 총 1조 달러 규모에 이르는 학자금 대출은 청년층의 목돈 마련을 방해한다.
우리나라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청년층이 선호하는 이른바 ‘양질의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고, 저임금 일자리에서 양질의 일자리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는 차단돼 있다. 인턴이 정규직 되는 게 마치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각하게 다뤄지는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얻을 정도로 살얼음판 같은 취업 시장에서 하루하루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데, 수억 원이 필요한 내 집 소유는 닿을 수 없는 목표일 뿐이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산업 구조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소유욕이 사라진 세대를 위해 리스 렌탈업이 성행한다. 남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서로서로 ‘공유’한다. 미국에서 대세가 된 카쉐어링 서비스가 국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년을 넘은 세대에겐 일시적인 유행쯤으로 보이겠지만 공유 경제는 ‘비소유 세대’의 등장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내가 젊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못 살았지만 밤낮없이 일해서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요즘 젊은이들은 눈높이만 높지 꿈도 없고 나약해 빠졌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험에서 나온 진실일 수 있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지금 집값은 저임금이라도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전세값이 워낙 올라서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이미 전세금 자체에도 대출이 들어가 있어요. 어떻게 더 빚을 져서 집을 사요?”
법정스님은 소유할 수 있었지만 무소유를 선택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소유할 수 없기에 비소유를 선택한다. 소유 세대와 비소유 세대 사이의 사다리는 이미 치워지고 없다.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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