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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어린 시절 나의 집

입력
2014.12.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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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물질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어릴 적 이사를 자주 했고, 작은 집에 살았고, 사촌언니들이 물려 준 옷을 입었지만 나의 집은 늘 따뜻하고 행복했다.

부모님은 방 한칸짜리, 7평짜리 집에서 나를 낳았다. 집이 커다랬다고 한들 걷지도 못하는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사진 속에 그 시절, 당시 유행하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젊은 나의 부모님 품에 안겨 있는 두뼘 밖에 안 될 듯한 조그만 나. 아무 걱정도 없이 해맑게 웃고 있다.

기억 속에 첫 번째 집은 거제도에서 살았던 집이다. 논두렁을 쭉 걸어 들어가야 하는 집이었다. 두 가족이 한 집에 살았고, 집 뒤에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었다. 매일 논두렁을 걸어서 유치원을 갔다. 내가 5살이었는데 엄마가 바쁠 때는 3살인 동생을 데리고 유치원에 가기도 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둥, 이 꽃은 뭐냐는 둥, 여기에 벌레가 있다는 둥… 끊임 없이 한눈 파는 동생을 데리고 유치원을 가는 날은 꼭 지각을 했다. 유치원은 바닷가에 있었다. 친구들이랑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온 불가사리를 갖고 놀기도 하고, 소라나 고동을 줍기도 했다. 소꿉 놀 것들이 천지에 있었다. 섬에 사는 아이답게 매일 매일 신나게 뛰어다녔다. 얼굴은 새카맣고, 머리에서는 바닷바람 냄새가 났다.

커다란 떡 바구니를 이고 우리집까지 떡을 팔러 오는 아줌마도 있었다. 엄마는 한번도 그냥 보내지 않고 떡을 샀다. 그 큰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아줌마가 어린 눈에도 힘들어 보였다. 엄마가 늘 떡을 사주는 게 다행스러웠다.

쓰다 보니 먼 옛날 이야기 같다. 아빠가 엄마에게 청혼할 때,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단다. 거제도의 그 집 멀리 바다가 보였다.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멋진 집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아빠가 약속을 지킨 집이라며 지금도 가끔 그 얘길 하신다. 나의 추억 속에서도 따스하게 빛나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어서 서울로 올라왔다. 4층짜리 아파트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동네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동네 꼬마들이 달려와 나의 실내화 주머니나 가방을 들어주며 학교는 어떤 곳인지 묻곤 했다. 1층에 사는 사내아이들 중 막내는 매일 같이 울었다. 2층에는 착한 엄마와 여자애가 살았다. 여자애는 늘 남동생에게 치였다. 그래서 내가 편을 들어주면 착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내가 3층에 살았고, 4층에는 정말 예쁜 아줌마와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 아줌마는 숱이 많은 내 머리 빗겨 주는 걸 좋아했다. 나도 아줌마가 좋았다.

모든 이웃이 서로 알고, 서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엄마들은 같이 요리를 하고, 애들은 그 집으로 몰려가 밥을 먹었다. 친구가 많았다. 집에는 늘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왔다.

2학년 때 아빠는 안동으로 발령이 나셨다. 안동에선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동네 뒤로 산이 있었다. 주말마다 아빠 손을 잡고 산에 놀러 가던 건, 정말이지 멋진 추억이다. 그때는 거기가 가난한 동네인지도 몰랐다. 마당 하나를 끼고 세 가족이 살았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고, 샤워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그래도 끼이익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이 참 좋았다. 마당 가운데는 장독대가 있었고, 물을 퍼 올리는 수동 펌프가 있었다. 아빠나 이웃집 할아버지가 물을 퍼 올리는 걸 보면 왠지 힘이 나고 시원했다.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아빠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아슬아슬하고, 신났던 마법같은 그 순간이 기억난다.

참 다양한 집에서 살았다. 어느 집에서든 행복했다. 온갖 주제로 이야기를 했고, 함께 놀았다. 밖에서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집에서 짜증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으면 나보다 더 흥분하며 내 편이 되어주었다. 늘 내가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를 가지고 있는지 느꼈다. 엄마는 늘 나와 동생에게 보물이라 불렀다. 나를 꼭 안아주는 그 품이 얼마나 따뜻한가. 어디서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집에서든 우리는 부자였다.

꽃별 해금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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