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위한 옷차림부터 상담까지 스스로 결정 못 내리고 타인에 의존
고민 묻는 소셜네트워크 앱들 인기
취업 등 삶의 기로 앞에서도 중압감에 기회 놓치는 경우 많아
"신중해서 나쁠 게 있나요?" 결정장애 젊은이들 스스로 강변
식당에만 가면 휴대폰을 꺼내 든다. 메뉴판을 보며 무엇을 먹을지 사다리를 타려는 것이다. 사다리 위쪽에 먹고 싶은 메뉴를 여러 개 적어놓고 마지막에 당첨되는 메뉴를 선택한다. 대학생 신모(25)씨는 "사다리를 타서 메뉴를 고르는 게 한편으론 장난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소한 결정이라도 매사 이런 식으로 택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다. 나 역시 그런 케이스"라고 말했다.
별의별 선택도구가 다 있다. 주사위 어플리케이션으로 주사위를 굴려서 나오는 숫자에 따라, 혹은 휴대폰에 내장된 초시계를 돌리다가 멈춰서 나오는 마지막 숫자에 따라 메뉴를 선택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예 선택도움 앱들도 대거 등장했다. '골라줘' '폴릭' '애스킹'처럼 고민을 공개 투표로 붙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소셜네트워크 앱들이 젊은 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 옷이나 가방의 색, 데이트를 위한 저녁식사 메뉴, 연애상담까지 다양한 질문이 올라오고, 그 질문을 본 사람들이 투표를 통해 의견을 모아주는 형태다. 좋게 말하면 최적의 해답을 찾기 위한 의견청취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타인의 말에 의존하는 현상이다.
이를 일컬어 젊은 이들은 속칭 '선택장애'라 부른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요즘 젊은 이들에게 특히 두드러진다.
고민 또 고민
음식이나 옷을 고를 때 주저하는 것은 흔한 고민이다. 선택장애는 훨씬 더 다양한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통 사람들에겐 전혀 고민거리가 아닌 것 같지만, 선택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에겐 아무리 사소한 결정도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대학생 손모(22)씨는 시험과 과제가 겹쳤을 때 과제를 먼저 해야 할지 시험 공부를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한다. 사실 이 문제의 답은 의외로 뻔하다. 과제는 마치고 나면 끝이지만 시험공부는 시험 직전까지 계속해야 하기에 과제를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손씨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야 안심이 된다. 시험 기간이 닥칠 때마다 주변 사람과 이 문제로 상담하곤 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지모(24)씨는 하숙집에서 학교로 갈 때 택시를 탈지 버스를 탈지가 고민거리다. 출퇴근 시간에 버스를 타기는 힘들지만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택시를 타기는 아깝다는 것이다. 그는 "버스를 타려고 하면 버스 대기줄이 길어지고, 버스 줄을 빠져 나와 택시를 타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버스가 금방 올 것 같아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타지 못해 지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축구 마니아 고모(27)씨는 축구 경기를 '직관(직접 관람)'하는 취미가 있지만 가끔 보고 싶었던 중요한 경기를 놓치곤 한다. 특별히 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고씨는 "경기 직전까지 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서 결국 포기하고 집에서 인터넷 문자중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고민으로 놓치는 중요 선택
선택장애는 삶의 방향을 바꿀지도 모르는 결정의 순간에도 위력을 발휘한다. 진로나 사랑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에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다가 선택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듯 살아간다.
직장인 정모(30)씨는 2년 전 여러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고 그 중 한 회사에 합격하게 됐다. 당장 일주일 후 출근해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고민에 빠졌다. 평소 가고 싶었던 분야의 회사 입사시험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직장에 취업한 친구들은 불확실한 도전을 하는 것보다 이미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옳다고 했다. 정씨는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원하는 회사의 시험을 포기하고 '끌려가듯이' 연수를 갔다. 후회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 원하는 회사에 갔더라도 지금하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원하는 분야 회사에 간다고 거기서 제가 꿈꾸는 일을 꼭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민모(28)씨는 소개팅을 통해 만난 남자가 무척 마음에 들어 연애 직전 상태에 있었다. 이른바 '썸'을 타는 중이었다. 만남을 거듭해도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만나는지 알 수 없었다. 민씨는 인터넷의 익명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답을 구했다. 댓글 의견도 분분했다. "마음에 들면 절대 놓치지 말라"는 말도 있었고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도 있었다. 민씨가 올린 글을 세심하게 분석한 누군가는 "남자가 마음이 있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갖고 노는 것"이라고 했다. 저마다 일리 있는 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고민하는 가운데 상대 남자와의 연락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래도 연애에 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넷에선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잖아요. 선택장애 비슷한 상황을 겪기는 했지만 그게 꼭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봐야 할까
이처럼 선택장애를 겪었다는 이들 중에는 오히려 "신중해서 나쁠 게 뭐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모(22)씨는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면 길게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송모(23)씨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주장했다. 그는 "선택장애란 말이 진짜 장애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의 고민을 독특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굳이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을 고민했던 정모씨와 '썸'을 연애로 발전시키지 못한 민모씨는 자신들이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지금보다 크게 나은 미래가 펼쳐지진 않았을 거라 말했다. 축구장에 가지 못한 고모씨는 이를 '현상유지 균형(status quo)'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는 "하나 안 하나 달라질 것이 없다면 애써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면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시대에 '선택하지 않음' 역시 현재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속전속결식 결정 못지 않게 지나치게 주저하는 선택장애는 분명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박모(31)씨는 "선택장애는 선택의 부담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의 선택을 습관적으로 미루는 것"이라며 "자신이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본인을 선택장애라고 소개한 한모(24)씨 역시 "후회를 하든 안 하든 내가 직접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며 "가능하면 과감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리버 예게스의 결정장애 세대론
"남에게 선택 미루는 습관은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과 완벽함을 향한 강박관념 탓"
'결정장애 세대'는 2012년 독일의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가 제시한 개념이다. 원어로는 '제너레이션 메이비(Generation Maybe)'라고 표현한다. 매사에 확실함이 없이 '아마도' '어쩌면' 식으로 행동한다는 의미다.
예게스는 결정장애를 개인의 문제 아닌 사회적 산물로 봤다. 그는 "1980년대에 출생해 1990년대에 성장한 사람들은 아날로그 문화가 디지털 문화로 빠르게 전환되는 경험을 했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겪은 탓에) 이들은 특정한 가치 기준에 몰입하기보다는 모든 관점과 취향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무언가를 확실하게 선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유보하려는 성향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두루 나타나는 경향일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에는 타인의 의견청취가 한층 용이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스마트폰을 통해 시시각각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에 비해 현 젊은 세대가 결정장애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장애는 지나친 '완벽주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 실수와 과오를 최소화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가급적 많은 정보, 많은 의견에 의존하다 보니 주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예게스는 지적했다.
선택장애를 겪는다고 말한 청년들도 예게스의 지적에 공감했다. 대학생 서모(23)씨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기 때문에 최적의 선택을 찾기 위해서 더 신중해진다"고 말했고, 한모(24)씨 역시 "한 선택을 했을 때에 다른 선택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이 남아있다"고 표현했다. 선택장애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은 박모(31)씨는 "선택을 남에게 미루는 습관의 원인은 결국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과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연다혜 인턴기자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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