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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산허리 따라 가니 비밀의 하얀 숲이 나타났다

입력
2014.12.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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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겨울 산허리를 따라 한시간쯤 걸으면 은밀하게 숨어있던 순백의 숲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다. 새하얀 수피가 볕 받아 오글거리는 꿈속 같은 세상이 거기 있다.
황량한 겨울 산허리를 따라 한시간쯤 걸으면 은밀하게 숨어있던 순백의 숲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다. 새하얀 수피가 볕 받아 오글거리는 꿈속 같은 세상이 거기 있다.

땅은 거칠어졌고, 사위는 조금 더 쓸쓸해졌다. 드디어 때가 됐다. 이파리 다 떨군 자작나무가 하얀 수피(樹皮)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시간, 눈(雪) 보다 더 하얀 나무의 등장으로 헐벗은 풍경이 풍요하게 바뀌는 계절. 이 경이로운 변화의 순간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면 강원도 인제로 간다. 원대리의 한갓진 산길 따라 한 시간쯤 걸으면 은밀한 자작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눈 내리면 꿈속 같고, 눈 없어도 늘 새하얀 세상이 거기 있다.

● ‘겨울의 귀족’ 만나러 가는 길

인제군 원대리 원대봉(684m) 능선에 그림 같은 숲이 있다. 그래서 ‘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통한다. 도착하기까지 발품 좀 팔아야 한다. 들머리에서 임도 따라 한 시간쯤 걸어야 하니 가벼운 트래킹까지 예상한다. 눈 많이 쌓였다 싶으면 아이젠이나 스틱을 챙긴다. 나중에 숲에 들어서도 유용하다. 경사 완만하고 길 폭도 넉넉하니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단 ‘HㆍP 가능지역’이란 안내말뚝 주변을 제외하면 휴대전화기가 터지지 않으니 세속의 일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낫다.

임도 따라 걷다가 고개 들면 당당한 준봉과 어우러진 자작나무들이 반긴다.
임도 따라 걷다가 고개 들면 당당한 준봉과 어우러진 자작나무들이 반긴다.

고도 높아지면 시야가 트인다. 맑은 겨울 하늘 아래, 어깨 견준 준봉들의 자태가 당당하다.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등등함에 가슴이 벅차다. 큰 기운 받고 걸으며, 인적 드문 계절의 호젓함을 만끽한다. 새소리가 참 맑다. 걸으며 ‘나’를 곱씹어 본다. 겨울에 누리는 호사다. 볼거리, 즐길거리 많은 계절에는 화려한 만물에 마음 뺏겨 ‘나’를 살피기가 만만치 않다. ‘올 한해 잘 견뎠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큰 숨 한번 들이켜면 퍽퍽한 세상살이에 맞설 힘이 솟는다. 공을 들여 찾아가는 숲이 반갑다. 자동차로 코앞까지 갔다면 못 느꼈을 것들이다. 한 시간의 거리를 긴 여정처럼 느리게 간다.

임도 주변으로 듬성듬성 뿌리 내린 자작나무들이 나타나며 숲의 등장을 예고한다. 파란 하늘로 뻗은 하얀 ‘직선’들이 눈을 희롱한다. 잎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볼품없는 나목도 사람 마음을 이렇게 설레게 할 수 있다. 속을 다 드러낸 나무에 마음이 움직인다. 고은 시인의 애를 그토록 태웠던, ‘타락을 모르는 겨울나무들’이다. 사람 사는 일도 이와 같으면 좋으련만, 속내를 온전하게 내보이면 종종 뒤통수 얻어맞는 역설적인 세상이다. 갈수록 사람보다 나무가 좋아진다.

초록의 침엽수림 가운데 자리잡은 하얀 자작나무 군락지는 자연의 현란한 붓질이다
초록의 침엽수림 가운데 자리잡은 하얀 자작나무 군락지는 자연의 현란한 붓질이다

굽이길 돌 때마다 저쪽 능선으로 나타나는 자작나무 군락지. 침엽수가 만든 초록의 캔버스에 아로새긴 자연의 현란한 붓질. 한낮 볕 받아 반짝이는 나무들이 촛불처럼 반짝이니 돈 주고도 구경 못할 걸작이 눈앞에 펼쳐진다. 비밀의 숲 찾아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천연한 야외 미술관이었다. 급할 것 없는 걸음으로 볕 따사한 오후를 걷는다.

하얀 숲에 들면 사람도 맑고 순하게 변한다
하얀 숲에 들면 사람도 맑고 순하게 변한다

● 사람도 맑고 순하게 변하는 새하얀 숲

숲은 종아리 근육이 좀 뻐근해진다 싶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란 안내판 아래로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튀어나올 것 같은 풍경의 등장이다. 하늘로 곧게 뻗은, 수많은 수직선들에 눈이 놀란다. 땅도 하얗고 나무들 드리운 허공도 하얗다. 검고 탁한 것이 이 숲에는 없다. 이런 숲에 들면 사람도 맑고 순하게 변할까 싶다.

조붓한 탐방로 따라 숲으로 든다. 자작나무 코스(0.9km), 치유 코스(1.5km), 탐험 코스(1.1km)가 마련돼 있다. 이름은 큰 의미 없다. 각각은 서로 붙었다, 떨어지며 숲 곳곳으로 뻗어 간다. 이러니 어느 길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숲에 머무르면 그만이다.

파란 하늘에 포개진 자작나무 우듬지
파란 하늘에 포개진 자작나무 우듬지

자작나무는 유용하게 쓰였다. 겨울에도 불이 잘 붙는 껍질은 땔감으로 썼다.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 자작나무다. 또 인도 등에서는 이 껍질이 글을 쓰는 종이를 대신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도 자작나무 껍질이란다. 목재는 질이 좋아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목판 일부가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수액과 껍질은 약으로도 쓰였고 껌으로 유명한 자일리톨 성분도 이 나무에서 추출한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나무다.

이런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의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백두산이 북위 42도쯤이니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강원도에는 제법 있다. 사람 손 닿기 어려운 산비탈에 인공으로 조림된 것들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 탐방로
원대리 자작나무숲 탐방로

원대리 자작나무숲도 1990년대 초반에 조림된 인공 숲이다. 약 138㏊(41만여 평) 규모에 70여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란다. 당시 산림청은 이 일대 큰 병충해 입은 나무들을 제거하고 이를 대신해 자작나무를 심었다. 이후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더니 어느 때부터 입소문 듣고 알음알음 찾는 이들이 생겼다. 산림청은 진입로 정비하고 탐방로 조성해 지난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생태수업도 진행하고 자작나무로 만든 인디언 움막도 지었다. 연인들도 이 움막 좋아한다. 여느 산비탈의 숲과 달리 힘들이지 않고 숲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개울 지나고 나무다리 건너며 매끈한 자작나무의 수피를 손으로 만져보고, 의자에 앉아 맑은 하늘과 어우러지는 우듬지도 음미한다. 낙엽송 사이에 뿌리내린 자작나무도 찾아보고, 자작나무 움막에 앉아 마음껏 게으름도 부린다. 멀리서만 봤는데, 이렇게 직접 숲에 드니 느낌이 딴판이다. 퍽퍽한 일상에서 얻은 생채기가 아물고, 도시생활의 가슴 먹먹함이 풀어지는 마법 같은 숲이다. 이런 숲에 들어 속세의 일을 잊으니 이게 ‘힐링’이다. 칼바람 살을 에는 겨울인데 숲은 여전히 푸근하다.

자작나무는 곧고 강직한 '겨울의 귀족'이다
자작나무는 곧고 강직한 '겨울의 귀족'이다

자작나무는 우듬지를 제외하고 스스로 가지를 친다. 가지가 다 떨어지면 수피가 더 잘 드러난다. 고결하고 정갈한 순백의 올 곧음. 자작나무 숲에 들면 삶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떨어낼 수 있다. 그리고 나면 내 안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곧고 강직한,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겨울에는 자작나무숲에 한번 가봐야 한다.

●여행메모

서울춘천고속도로 동홍천IC로 나와 국도 44호선을 타고 인제 방면으로 간다. 38선 휴게소 지나면서부터 ‘원대리 자작나무숲’ 이정표가 나타난다. 남전교 건너기 직전 남전리ㆍ원대리 방면으로 우회전해 이정표 따라 약 17km 가면 원대리 자작나무숲 주차장이다. 산림감시초소에서 자작나무숲까지 약 3km. 걸어서 1시간 거리다. 입장료는 없고 초소에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들어가면 된다. 동절기에는 오후 2시 이후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다. 올해 가을철 산불조심기간(11월1일~12월15일)에는 출입이 허용됐지만, 보통은 금지된다. 사전에 출입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낫다. 북부지방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인제모험레포츠연수원 앞에 있는 옛날원대막국수(033-462-1515)의 막국수와 편육이 유명하다. 저녁 장사 안하니 오후 5시 이전에 가야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 산림감시초소에서 차로 5분 거리다.

인제=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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