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회에서 자살은 무고한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나타내는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됐다. 초신(楚臣), 초루(楚?) 등은 모두 억울한 자살을 뜻하는 용어다. 초신은 초 회왕(楚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였던 굴원(屈原)을, 초루는 굴원이 유배되었던 곳을 지칭한다. 굴원은 모함을 받고 쫓겨나 유배당하자 억울한 심경과 우국충정을 담은 이소경(離騷經), 어부사(漁父辭), 회사(懷沙) 등 초사(楚辭) 작품을 짓고 상강(湘江)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자신의 목숨을 아꼈던 제왕들일수록 타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이러니다. 서불 등 방사(方士)를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했던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여러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조선을 침략했던 한 무제(武帝)도 그런 유형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도교에 깊게 심취한 한 무제는 신선을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해서였다. 제왕이 장생불사에 몰두하니 이를 이용하는 인물들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기-무제 본기’에는 무제가 방사(方士) 이소군(李少君)에게 푹 빠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소군은 장생불사의 술법을 알고 또 신선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큰 소리쳤는데, 그가 만났다는 신선은 진 시황 때 선인(仙人) 안기생(安期生)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따르면 안기생은 진 시황과 사흘 밤낮을 이야기한 후에 “수십 년 후에 봉래산(蓬萊山)으로 와서 나를 찾으라”고 말하고 갔다는 인물이다. ‘사기-봉선서’에 따르면 이소군은 한 무제에게 “신(臣)이 일찍이 해상(海上)에서 안기생이 오이만한 대추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무제는 신선을 만날 큰 기대를 가졌으나 끝내 신선을 만날 수는 없었다. 송(宋)나라 이방(李昉)이 지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따르면 한 무제는 이소군이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이소군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신선 세계에 올라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무제가 방사를 좋아한 것은 끝내 자신의 자식인 여 태자(戾太子)를 자살하게 까지 한다. ‘무고(巫蠱)의 옥사’가 그것이다. 무고란 주술 등의 방법으로 사람을 음해하는 것을 뜻한다. 무제 때 많은 방사들이 궁중에 드나들었는데, 궁녀들을 위해 액막이를 한다면서 지붕에 나무 인형을 묻어놓았다. 궁녀들은 다른 궁녀가 자신을 음해한다면서 서로 고발했다. 때마침 무제가 위독해 강충이 “주술 때문”이라고 말하자 무제는 강충에게 범인을 찾으라고 말했다. 여 태자(戾太子) 유거(劉據)의 거처에서 나무 인형이 많이 나오자 평소 여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강충의 무고라는 소문이 번졌다. 태자는 강충을 찾아가 호소했는데도 듣지 않자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죽였다. 강충의 잔당이 무제에게 달려가 “태자가 난을 일으켰다”고 말하자 무제는 승상 유굴리(劉屈?)에게 진압을 명했다. 두 진영은 장안에서 닷 새 동안이나 전투를 벌여 사망한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세불리를 느낀 태자는 장안 동쪽 호수로 도망가 목을 맸고, 그 모후이자 한 무제의 두 번째 황후 효무위(孝武衛) 황후도 자결하고 말았다. 고려 말의 문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문집인 도은집(陶隱集)에는 ‘사문도에서 회고하다(沙門島懷古)’라는 시가 있는데, “참외만 한 대추 먹었다는 안기생 이야기는 공허한데/석양의 무릉에는 가을풀만 우거졌네(安期空有棗如瓜/斜日茂陵生秋草)”라는 시를 남겼다. 무릉은 한 무제의 릉호(陵號)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조의 일곱째 왕자로, 정빈(靜嬪) 민씨(閔氏) 소생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도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인조반정 이후에 인성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상변(上變)이 발생하면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 6년(1628)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죽음을 벽혈(碧血)이라고 한다. 주(周) 나라 경왕(敬王)의 대부였던 장홍(?弘)이 충간(忠諫)을 했는데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촉(蜀)으로 쫓겨나자 할복 자살했는데, 그때 흘렸던 피가 3년 후 푸른 옥(碧血)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외물(外物)’에 나온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정윤회 씨 국정개입 감찰 사건에 연루된 서울경찰청 정보1분실 최모(45) 경위가 자살의 길을 택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시스템으로 진실이 밝혀지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우리 사회가 자꾸 뒤로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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