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빨갱이 잡아내던 시절 삼벌레고개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살얼음 같던 평화가 깨어지고 폭력과 불행이 덮치는 장면 생생히
올해 한국 문학의 한 흐름을 이야기할 때 첫손에 꼽을 것은 아무래도 ‘그때 그 시절’일 듯하다. 국가의 폭압이 기형의 인간들을 양산하던 시절. 폭력의 시대가 남긴 상처는, 체내 방사능처럼 대를 물리며 점점 더 세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깃거리다.
소설가 권여선의 ‘토우의 집’은 시름에 잠긴 어른들을 방문 틈 사이로 훔쳐보는 아이의 흔들리는 동공 같은 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대략 애들 용돈이 10원이던 시절, 빨갱이란 단어가 천형처럼 들리던 때다. 삼악산을 복개해 만든 동네 삼벌레고개 중턱 우물집에 한 부부가 세 들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새댁이라 불리는 아내는 나이로 치면 새댁을 한참 벗어났지만, 핸드백 안에 분첩 대신 잉크와 펜이 있다는 점, 그 펜대로 폭포수 같은 한자를 휘갈겨 쓴다는 점 때문에 어쩐지 계속 새댁으로 불린다. 남편 역시 아내에게 존대를 하고 딸 영이와 원이에게 자상한 아버지라는 것만으로도 삼벌레고개에서 매우 이질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우물집 안주인이자 마을 아낙들 사교 모임의 중심인 순분은 새댁네가 풍기는 “야릇한 급진성”이 몹시 거슬리지만, 계 모임에서 새댁네를 반찬거리 삼아 수다를 떠는 것으로 해갈한다. “어느 날!” “어느 날?” “밤중에 계단에서 내려오다 뒤퉁맞게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나!” “골반뼈가 깨져서…” “저를 어째!”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답니다.” “아이고, 세상에나!” 순분은 새낵네 자살한 시누이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각색해 계원들에게 들려준다. 6.25 때 빨갱이한테 부역한 혐의로 고문을 당해 정신이 나갔다는 시누이는 앉은뱅이가 되어 남이 항문에서 변을 파내줘야 할 처지가 되자 자살해버렸다.
아낙들의 리드미컬한 험담처럼, 소소한 악의를 동력 삼아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던 삼벌레고개의 평화는 순분의 일곱 살 난 아들 은철이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마을 여인들과 일체의 교제를 끊은 순분은 어린 아들이 울면서 똥을 눌 때마다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그 죄를… 어떻게 다…!”
새댁네 남편이 빨갱이 혐의를 쓰고 끌려가 시체로 돌아오면서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 버린다. 폭포수처럼 강직했던 새댁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을 놔 버리고 순분은 그를 수습하는 마을의 유일한 사람이 된다.
폭력과 불행에 짓눌려 허덕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작가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찬란한 아이들의 세계로 덮는다. 일곱 살 동갑내기인 원과 은철이 맥락 없이 발산하는 환희의 에너지는 소설의 중심이자 작가의 관찰력에 몇 번이고 경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네 말대로 타이즈 안 신길 백 번 잘했구나.” “백 번이나 잘했어요, 어머니?” “그래, 백 번이나 잘했다.”시동생에게 돈을 꾸러 가는 길, 새댁의 입에서 나온 관용어 ‘백 번’에 원의 기쁨은 금세 백 배나 부풀어 오른다. “제 말대로 하길 잘했지요, 어머니? 제 말 듣길 백 번 잘했지요? 두 번이니까 이백 번 잘했지요, 어머니?”
아이들의 찬란한 세계는 척박한 현실을 타개하는 힘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척박함이 대물림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드러낼 뿐이다. 원은 엄마가 미쳐버리자 말을 잃었고, 은철은 따뜻한 이웃과 친구, 그리고 왼쪽 다리를 잃었다.
작가는 세 번째 장편인 이 소설에 대해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겪은 또 다른 실패”라고 말했다. “크기는 다르지만 누구나 고통을 겪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은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 작은 고통을 통해 세상의 큰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위로 받는 그 순간을 위해 계속 글을 쓰게 됩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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