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기업, 혁신기술 뒤쳐져 몰락...소니·노키아 등 '와해서 혁신'
구글·알리바바 등이 금융업 위협...'와해성 성장' 계기로 만들어야
첨단기술 시장에서 기업경영의 태평성대란 없다. 모토로라, 노키아, 소니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는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분야에서 많은 기업의 부침을 연구한 결과, 선도기업이 갑작스럽게 추락하는 현상에는 기술의 변화라는 복병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고 명명했다. 와해성 혁신 이론은 최근 첨단기술 산업뿐 아니라 제조ㆍ서비스업 분야에서 초기에는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던 혁신기술이 폭발적인 파괴력으로 기존 선도기업을 추락하게 만드는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IT 업체 시게이트기술은 1980년대 중반 5.25인치 하드디스크의 선두주자로 창업 6년 만에 약 7억달러 매출을 올리며 유망 벤처기업으로 떠올랐다. 당시 이 회사 연구진은 3.5인치 하드디스크를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3.5인치 하드디스크는 20메가 용량을 가진 5.25인치에 비해 용량이 절반에 불과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경영진은 이 제품을 생산하기에 앞서 기존 고객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3.5인치를 원하는지를 물었다. 고객들은 크기와 용량이 작은 하드디스크보다는 용량이 큰 것을 선호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노(No)’ 였다. 신상품이 기존 상품보다 더 못한 기술인 데다 마진도 적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재무ㆍ생산부서까지도 작은 크기의 하드디스크 생산에 반대했다. 그러나 3.5인치 하드디스크를 개발한 연구진은 작은 하드디스크가 꼭 필요한 세상이 올 것으로 믿었다. 이들은 사표를 내고 3.5인치 디스크만 생산하는 카너 페리페럴스라는 회사를 창업했고 4년 만에 19억달러라는 놀라운 매출을 올렸다. 기존 시게이트의 시장을 빼앗아 업계 선도기업으로 등극한 것이다.
최근 인터넷과 스마트기기 붐을 타고 핀테크(파이낸셜 테크놀로지ㆍ금융기술) 바람이 거세다. 영국 런던시는 낙후된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테크시티’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핀테크를 중점 육성하고 있다. 런던시는 1,300여 개의 핀테크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전 세계 핀테크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도 핀테크 붐이 일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고객들이 속속 이탈하는 ‘은행탈출(de-banking)’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핀테크 스타트업이 기존 고객들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구글 월렛, 애플페이 등이 카드결제 사업에 나서면서 은행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다보스포럼에 모인 최고경영자(CEO) 중 무려 60%가 핀테크 사업 진출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세계의 금융산업이 거센 도전에 직면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세계 핀테크 바람 속에서 롤 모델이 되고 있는 기업은 다름 아닌 중국 알리바바다. 알리바바는 2013년 위오바오라는 머니마켓 펀드를 출시하여 불과 1년 만에 1억명의 고객을 유치하는 등 자산 총액만 100조원에 육박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중국정부는 은행설립 허가까지 내줘 핀테크에 기반한 은행이 출범할 수 있게 했다.
세계 금융권에 대한 핀테크 기업들의 거센 도전에 비해 우리나라 금융업은 매우 더디게 반응하고 있다. 핀테크 스타트업 벤처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빈약한 실정이다. 다행히 지난달 카카오월렛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핀테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그럼에도 금융기관들이 다소 느리게 대응하는 이유는 당장 위험이 가시적으로 확실하지도 않을뿐더러 대응전략을 세우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게이트의 실패사례를 상기해 보면 보다 시급하게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특히 금융기관 경영자들은 크리스텐센 교수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와해성 기술을 위협이라기보다는 ‘와해성 성장(Disruptive Growth)’의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시장을 창조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는 또 와해성 기술은 너무 많아 일일이 대응할 경우 고비용과 고위험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스스로 죽이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어 섣불리 대응해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 금융기관 경영자들이 핀테크의 도전을 와해성 성장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세계의 금융기관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이영환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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