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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별빛은 모든 곳을 비춘다

입력
2014.12.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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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광장에 알록달록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가 빛난다. 벌써 한 해가 저물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사느라 바쁘고 일하느라 지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던 우리에게 이젠 너그럽게 마무리하고 쌓인 허물 있으면 서로 용서하고 새해 맞으라는 듯 색색의 등이 반짝인다. 백화점 앞 트리는 호객을 위해, 애기봉 트리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삼갔던 것을 다시 세워 밝히는 것과 달리 광장의 트리는 시민 모두에게 크리스마스의 따사로움과 너그러움으로 도닥인다.

크리스마스가 시기적으로 동지와 맞닿아 있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가장 길었던 밤이 사위고 빛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아기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참한 상태로 세상으로 나왔다. 어느 누가 그토록 작은 마을,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났던가. 그 자체가 탄생의 의미를 함축한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한 탄생임을 상징한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할 정도로 단호하게 싸웠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그런 예수 복음의 시작이고 그 자체가 거대한 의미다.

물론 부자 마을에도 예수가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과 재력을 축하하고 더 큰 복을 강복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혹여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그것도 나보다 못한 자의 불행을 강제한 것은 없는지, 탐욕에 눈멀어 사람 값 제대로 못하지는 않았는지 살피고, 잘못은 질책하고 새로운 인격의 삶을 살라고 타이르기 위해서 찾아간다. 1% 미만의 부자들이 사는 곳에는 교회도 성당도 크고 화려하다. 그 교회에서 대통령도 나오고 장관들도 즐비하며 재벌들도 많다. 예수 믿어 그리 복 받았다고, 더 큰 충성을 다짐한다. 그걸 탓할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들만의 축복을 위해 일종의 신앙카르텔을 만들고 있는 조짐은 경계할 일이다.

어느 부자 동네 아파트에서 인격적 모멸감에 분노한 경비원이 분신했다. 입주민들로서는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비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이 사람의 가치에 대한 마지막 호소라는 점에서 소신(燒身)공양일 수 있음을 깨달은 이들이 있을까? 그런 삶에 대해 공감해야 할 까닭도 없고 그럴 일이 자신에게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이들로서는 별 무관심인 모양이다. 그러니 오히려 자신들 망신시켰다며 아예 남은 경비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바로 코앞에서. 말로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태만 등의 이유로 교체한다지만 여러 해 문제없던 걸 빌미로 속 보이는 변명만 늘어놓는 것임을 모르는 이 없다.

그 아파트에 교회, 성당, 절에 다니는 이들 많이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내 일 아니라 여겨서, 혹은 경비원의 분신에 오히려 분노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고 어찌 교회, 성당, 절에 다니는지 모르겠다. 예수 부처의 가르침은 그냥 건강식으로 드셨던 모양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문제에 대해 동네 대형교회들이나 성당, 절에서 비판하고 반성하라고 따끔하게 아파트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부자 신자, 권력자 신자 많이 모여서 자기네 교회 힘 과시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서야 예수 부처 팔면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 누추한 여관의 마구간에서 예수가 태어난 것은 여관의 방이 다 찼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남산처럼 배부른 산모에게 방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아이 태어날 때 어느 누구 하나 나와서 방으로 들이지 않았다. 멀리 목동들과 동방의 박사들은 찾아왔지만 정작 같은 여관에 있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그 여관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으로 아기예수를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목자로, 동방박사로 착각하며 구유에 누운 아기에 경배하지 말 일이다. 아름다운 밤하늘 별빛은 그 동네만 비추는 게 아니다. 경비원 해고 철회한 뒤에야 경배하라! 예수를 부끄럽게 하지는 말 일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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