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안 가면 혼자 갈래요" 아들 말에 효순·미선 추모 촛불 1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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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안 가면 혼자 갈래요" 아들 말에 효순·미선 추모 촛불 108일

입력
2014.12.1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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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서 집회 하루 건너뛰려다 혼자 가겠다는 아들에 부끄러웠죠

촛불 인파에 슬픔·분노·굴욕 뒤섞여 함께 손잡고 걸으며 참 많이 울어

'잊지 말자'도 좋지만 직접 참여해야

2002년 '신효순·심미선양 미군장갑차 사망사건 촛불시위'에 초등생 아들과 108일간 매일 나온 시민 신영철씨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인근에서 만났다. 신씨는 "이 자리에 시민의 성금으로 두 여중생을 기리는 촛불기념비를 세웠는데 2004년 1월 종로구청이 불법건축물이라며 철거한 이래 어디에 버려져 있는지조차 몰라 안타깝다"고 씁쓸해했다. 홍인기기자hongik@hk.co.kr
'신효순·심미선양 미군장갑차 사망사건 촛불시위'는 주말 집회마다 인파가 불어 12월 14일 최대인 10만 여명이 운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많던 양초는 다 어디 갔을까. “양초요? 양초는 없어요.” “향초는 있는데….” 광화문 사거리 일대 편의점과 팬시점을 뒤졌다. 여섯 군데를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그의 사진엔 꼭 ‘촛불’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종이컵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양초를 끼워 밝힌 그 촛불 말이다. ‘저 집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들어간 일곱 번째 집에서 다행히 양초를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불법 시위용품이 돼버려 그럴까요?” 신영철(52)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양초와 종이컵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그는 능숙하게 종이컵 바닥에 구멍을 뚫어 양초를 꽂았다. 촛불이 신씨 얼굴을 환히 비췄다.

신씨는 시민이다. 그런데 조금 특별한 시민이다. 12년 전 ‘신효순ㆍ심미선양 미군장갑차 사망사건 추모 촛불집회’에 108일간 빠지지 않고 나왔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신한얼)과 함께였다. 집이 서울도 아니었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버스와 지하철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은 강원도 홍천에 사는 신씨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앞에서 만났다. 2002년 여중생 추모 촛불을 처음 밝힌 곳이다.

“한참 촛불시위에 나올 때는 볼펜심이나 열쇠로 한번에 종이컵 7, 8개씩을 뚫었어요. 나중에는 아예 대량으로 구멍을 낼 수 있는 공구를 만들어왔지요. 공업사에서 파이프와 쇠송곳을 구해와서 50개들이 종이컵 묶음을 봉지째 엎어 넣고 뚫었어요.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뭐라도 돕고 싶더라고요.”

당시 촛불시위는 아이디 ‘앙마’를 쓰는 김기보씨가 인터넷 게시판에 “광화문을 반딧불이 바다로 만들어 평화로 미국의 폭력을 꺼버리자”며 올린 글이 불쏘시개가 됐다. 이 게시물이 널리 퍼졌고, 온라인의 네티즌을 현실의 광장으로 끌어냈다. ‘약속의 날’인 2002년 11월 30일 1만 명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교보생명 앞에 나왔고 주말을 거듭할수록 숫자는 급격히 불었다. 12월 7일에는 5만 명, 12월 14일에는 최대 인파인 1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섰다. 그러다 보니 2002년 겨울, 광화문 일대 상점 중엔 양초를 팔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노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신씨는 12월 7일부터 매일 아들 손을 잡고 촛불시위에 나왔다. 대규모 집회가 열렸던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 거리에 섰다. 그의 눈엔 아직도 수많은 촛불들이 선한 듯 했다. “어둑해지기 전인데도 이미 시민 수천 명이 촛불을 들고 나와 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아들과 있는 게 의아했는지 하루는 사회자가 무대로 불렀어요. 마이크를 잡긴 잡았는데, 하늘이 노래서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요(웃음).”

광화문 사거리 일대에 10만 명이 모였던 날의 감동은 지금도 그의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촛불을 든 채 주한 미국 대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순간이 특히 그렇다. ‘아침이슬’ ‘광야에서’를 부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왕복 16차로의 세종로에 사람들이 가득 차 그야말로 송곳 세울 틈도 없었다.

“아직도 생생해요. 참 많이 울었어요.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걷는데 그들도 울고 있는 거예요. 혼자 걸으며 울고, 가족이나 친구 손을 잡고 걸으며 울고….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남으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아주 특별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때 촛불 인파에는 슬픔과 분노, 굴욕감이 한데 뒤섞여 출렁였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6월 13일, 두 여중생이 주한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친구 생일파티에 가는 길이었다. 그들이 나고 자란 동네인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도로 폭은 3.3m에 불과했는데, 궤도차량의 폭은 3.67m였다. 미군이 그 좁은 도로로 이동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길에는 인도조차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늘 아슬아슬하게 갓길로 다녔다. 그날 여중생들도 그랬다. 사고는 궤도차량의 맞은편에서 다른 미 제2사단 소속 브래들리 장갑차 행렬이 오면서 일어났다. 브래들리 장갑차를 비껴 가려 궤도차량이 학생들을 친 것이다.

사고 5개월 뒤인 11월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 군사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궤도차량의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무죄 평결을 받았다. 참았던 한국 시민들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그럼 장갑차라도 구속하라”고 외쳤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부당함을 우리 국민이 알게 된 계기도 이 사건이었다. 22조 3항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주한미군이 공무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해도 미국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미국이 한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특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판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장갑차 사망사건의 충격이 크자, 우리 정부는 사상 처음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이런 비상식과 불합리한 한미 관계가 수 만 명의 시민을 거리로 끌어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무슨 사상 공부한 적도 없고, 운동권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장갑차 사망사건을 보면서 불평등의 모순을 강하게 느낀 거지요.”

아홉 살 아들을 시위 현장에 데려 나온 건 당초 ‘세상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였다. “부모가 나서 해라 마라 하는 게 아니라, 가리지 않고 경험하게 해주되 판단은 스스로 하게 하자는 게 저의 교육 방식이었어요. 과외보다 세상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촛불시위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108일 동안 매일 집회에 나간 건 어떤 계기에서였을까. “며칠을 계속 가다 보니 제가 피곤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한얼이한테 ‘오늘은 가지 말자’고 했더니, 그럼 차비를 달래요. 혼자라도 다녀오겠다고. 집회에서 ‘미국이 사과하고 한미SOFA가 개정될 때까지 촛불을 들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예요. 부끄러웠죠.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함께 나간 게 108일까지 이어졌어요.”

신씨는 그때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세월호 침몰 참사 때 국민들이 다짐한 게 ‘잊지 말자’라는 거였잖아요. 저는 잊지 않는 것뿐 아니라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해결을 위해서요.” 지금도 그가 틈틈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 집회나 도보행진에 나가는 이유다. 노동조합원도 시민단체 회원도 아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다.

“저도 겁 많은 사람이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우리 자식 세대에는 이런 불합리한 세상은 물려주지 말자는 약속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 노릇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요. 다음 세대는 이렇게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겠어요?”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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