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인사 뿌리는 대통령 독선이다. 어차피 자기가 챙길 일. 능력 무관하고 절차 소용없다. 사욕 없는 주군의 과대망상은 기생 권력의 든든한 방패다. 사사로운 애국이 공익을 해친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와 결혼한 여성’이다. (…) 그는 자신이 늘 공적(公的) 가치를 개인보다 앞세우는 삶을 살아왔다고 믿고 있다. 얼마 전에도 “일생을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대통령 주변의 비선(秘線) 실세를 둘러싼 의혹이 불거진 직후 나온 박 대통령의 첫 반응도 이런 평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대통령은 거듭 “나는 흔들릴 이유도 없고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파이팅’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 ‘내가 가는 길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박 대통령 특유의 소명(召命) 의식에 당장의 어려움은 먼 훗날 역사의 평가를 보고 이겨내겠다는 결기가 더해졌다.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앞세우는 박 대통령의 말에는 적잖은 울림이 있다. (…) 그러나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일들이 빈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이뤄진 한 시중은행장 인사(人事)다. 우리은행장에 대통령의 대학 동문이 내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과거에도 금융계 인사는 대통령의 고교·대학 동문이거나 동향(同鄕) 출신 발탁이 잦았던 만큼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올 들어 금융회사 CEO(최고경영자)에 오른 이 대학 출신이 4명에 이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상 싹쓸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 쪽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에게 이 대학이 과거에도 금융권 CEO를 대거 배출했는지 물었다. 한결같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로부터 ‘오더’가 내려오면서 대통령 대학 동문이 대거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고 했다. 후보추천위원회 같은 공적 기구는 들러리로 밀려났다. (…) 박 대통령은 불과 2년 전 대선 승리 직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사기를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가 새 정부에선 없어져야 한다”고 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는 과거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 2년 전 쩌렁쩌렁했던 대통령의 ‘낙하산 근절’ 외침이 기억에 생생하고, 대통령이 연일 ‘나라를 위하는 길만 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 최근 불거진 대통령 주변의 ‘비선 실세, 문고리 의혹’의 본질도 인사 문제다. 여당에서 1년 넘게 비선·문고리 의혹에 대해 수군댔던 것도, ‘문고리 3인방’에 반대하는 쪽에서 들고일어난 것도 결국은 이들이 모든 인사를 독식한다는 불만에서 비롯됐다. (…) 대통령이 공직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인이 말해온 공적 가치를 지키려고 마음먹었다면 대통령 주변에서 좋지 않은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선제적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문제만 나오면 유독 사적 기준에 휘둘려 왔다. 주변의 어떤 충고나 건의에도 귀를 닫아버렸다. 최근 들어선 당장의 현실보다는 미래의 평가를 더 중시하는 순교자 같은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임기 중반 무렵부터 ‘역사와의 대화(對話)’에 빠져들곤 했다. (…)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한 정계 원로는 “가장 위험한 때가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독선(獨善)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대통령이 ‘역사와의 對話’에 빠져드는 순간(조선일보 기명 칼럼ㆍ박두식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의 비교연구에 따르면 선진국인 네덜란드의 압도적인 가치는 관용이고 다음이 경쟁이다. 독일과 미국에선 경쟁이 첫 번째지만 두 나라 모두 평등·연대·관용의 삼총사가 보완해주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경쟁의 중요성이 절대적이다. 문제는 그 다음의 가치도 경쟁의 다른 이름인 성공이라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관용을 가르쳐야 한다는 응답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62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지구의 어디에서도 이런 승자독식의 강박증은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인 경쟁과 탐욕의 결과는 너무도 우울하다.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6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 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공공성 수준은 최하위인 33위다. (…) 장 교수는 세월호 참사의 근원에는 우리 사회의 공공성 부족이 있다고 진단했다. “경쟁을 하더라도 침몰하는 순간이 오면 같이 해결하겠다”는 공동체적 윤리가 우리에겐 없다. 그게 있으면 경쟁도 정의로운 가치가 된다. (…) 세상을 뒤흔든 ‘비선 실세’ 파문도 실은 극도로 낮은 공공성이라는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선’이 국가 권력을 농단해 왔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각자도생의 탐욕이 최소한의 분별을 요구하는 공공성을 희롱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번 소동에 등장하는 ‘비선’과 ‘문고리’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행사했다는 공통적인 혐의가 있다. 헌법 1조 2항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적혀 있다. 만약 ‘문고리 3인방’의 월권이 사실이라면 헌법은 국민을 속이는 허위의 문서가 된다. 한국에선 통치의 대상인 백성에서 국가 권력의 원천인 시민으로의 진화가 미완성 상태일지도 모른다.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이루고 공공정신과 도덕을 내면화한 시민으로 직립(直立)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구미(歐美)는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던 18세기의 황혼이 채 저물기도 전에 시민혁명의 통과의례를 치렀다. 그래서 스스로 시민의 면허증을 따고 권력의 주체가 됐다. (…) 대혁명의 여정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겐 아직도 민주적 시민성, 시민적 참여가 남의 옷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희망과 탄식이 교차하는 역사의 바다를 쉬지 않고 항해해야 우리도 시민의 라이선스를 가질 수 있다. (…) 대통령이 혼돈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역사의 바다를 함께 항해하기 바란다.”
-혼돈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는 길(중앙일보 기명 칼럼ㆍ이하경 논설주간)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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