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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절, 동심 지키려 노래와 현실 사이 두터운 벽을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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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절, 동심 지키려 노래와 현실 사이 두터운 벽을 쌓아

입력
2014.12.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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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보편적 소망과 맞닿은 '반달' 봉인된 행복의 시간 '설날'

100편이 넘는 동요·동시 만들며 삶의 드라마·사회적 의미와 거리 둬

일제 압정·전쟁 등과 단절을 시도

개인적 감성 표출이 상처받던 시대 아이들에게 보편적 정서 노래하게 해

지난 11월 15일은 윤극영의 2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서울시는 유족의 뜻을 받들어 그가 살던 집을 ‘서울시 미래유산 제1호’로 지정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들에게 윤극영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전란 직후의 황막한 세계에서 바로 우리들이었던 어린이들에게 노래의 개념과 시의 개념을 함께 가르쳤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책에 실렸던 많은 노래들을 윤극영이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사실을 이미 그때에 알았더라면, 훗날 시는 곧 노래라는 말을 들을 때 맨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윤극영의 유족들이 현대문학사와 함께 펴낸 ‘윤극영 전집’(2004)에 의하면, 그는 11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였으며, 동요 동시 100편을 썼다. 그가 한국 최초의 전문적 동요 작가로 우리 아동문학에 하나의 기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그 전범이 되어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1923년 방정환, 손진태, 마해송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할 때,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위한 단절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 때 단절은 우선 과거와의 단절이었지만 상당 부분은 현실과의 단절이기도 하였다. 윤극영은 여러 산문에서 자신의 창조활동을 줄곧 민족적ㆍ사회적 책무감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자신의 동요 속에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내용을 담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사이에는 두터운 칸막이벽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칸막이벽은 아이들을 그 안에 가두기 위해서이기보다는 외부 풍속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더 큰 기능이 있었기에 그 안의 세계는 점령지에 둘러싸인 마지막 자유의 땅과 방불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생활현장과 주변의 자연 사물에서 동요의 소재를 얻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내용은 없지만, 주제를 다루는 특별한 태도에 의해 그 내용은 삶의 구체적 드라마와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윤극영은 이 태도를 그의 수백 편 동요에서 고루 유지하고 있었기에, 어린이의 격리 보호가 그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숨은 주제이자 그 사회적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기 동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초기의 걸작 ‘반달’에 대해 윤극영 자신은 이 노래가 누이를 잃은 설음을 기본 정조로 깔고 있으며, 민족의 진로를 찾으려는 염원으로 노랫말의 결론을 삼았다고 말하며,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로 끝나는 제2절을 생략하지 말고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는 구절에서 곧바로 죽음에 대한 상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특히 “가기도 잘 간다”는 대목에서는 잔잔한 물결 위로 희망을 담고 흘러가는 쪽배를 연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깊고 청량한 그리움이 있지만, 그 동경의 내용은 순결한 만큼 개인적 정서를 넘어선다. “샛별 등대”가 어둠 속에서 진로를 모색하고 창출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 염원이 특정한 사회의 시대적 명제라기보다는 인류학적 소망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옳다. 이 노래는 식민지 치하의 한국인에게뿐만 아니라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달에 대해 동일한 정서적 전통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같은 정한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인민음악사(人民音樂社)에서 발간한 한 어린이 음악 잡지는 이 노래를 “조선민요”로 소개하며, 그 악보와 중국어로 번역된 노랫말을 싣고 있다. 이 창작곡이 민요로 오해된 데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문화정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탓도 있고, 8분의 6박자의 서정성 깊은 박자와 도미솔을 위주로 한 소박한 선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노래가 한 시대의 구체적 애환을 전달하기보다 인간의 기본 정서에 닿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식민 당국의 가혹한 압제와 음악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를 염두에 둔다면, 이 노래가 획득한 보편적 정서는 현실을 뛰어넘어 이룩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괄호 속에 넣어 미래의 숙제로 남겨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설날’도 우리가 오랫동안, 특히 가난한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이 동요에는 호사로운 설빔과 풍족한 세찬, 널뛰기와 윷놀이 같은 흥겨운 유희, 호령과 꾸지람이 일시 중단된 가정 분위기 등이 간략하면서도 소상하게 열거된다. 그러나 이 노래는 세시의 풍정만을 흥겹게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일상으로부터 단절된 시간의 개념이 들어 있다. 그에게 동요를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연습하는 시간은 설날의 특별한 아우라를 까치의 예고처럼 예행연습하는 것이며, 그 감정을 그 이후로까지 연장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새해 첫날이 오면 다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이 노래는 제 때가 아니라도 그런 기분을 내가며 늘상 불리곤 했다.” 이것은 같은 유고에서 윤극영 자신이 하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설날의 행복과 노래하는 시간의 다사로움이 아니라, 그 기쁨과 다정함이 앞뒤로 불행한 시간과 적대적인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행과 적대적인 시선의 포위가 그 도려내어진 시간에 신비로운 봉인으로 구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기잡이’는 경쾌하고 오락적 기능이 강한 노래이다. 노랫말은 그의 다른 동요와 마찬가지로 평이하지만 따져보면 의문이 없지 않다. 첫 대목에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라고 묻는데, 강에서의 고기잡이와 바다에서의 고기잡이가 그 규모와 방법에서 같은 것일 수 없다. 노래를 만든 사람과 부르는 사람이 고기잡이 자체보다는 말의 반복이 만들어 주는 선율의 흥분을 더 즐겼을 것이 틀림없다. 전체가 4행련 3절로 되어 있는 이 노래는 고기잡이를 떠나서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오겠다는 계획을 매우 간략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선생님 모시고 가고 싶지마는”이란 말에 따라 선생님과 함께 떠나고 싶은 학생들과 그럴 수 없는 선생님 간의 인간관계가 끼어들어 일종의 클로즈업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선생과 학생들이 맺고 있는 돈독한 애정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의 벽과 무게에 대해 어른과 아이들이 느끼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라고 말할 때 현실의 암담한 무게는 떠나는 아이들의 등 뒤에 과거의 몫으로 남는다. 윤극영은 이 ‘고기잡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유고 ‘어촌의 역학’에서 그는 이 동요와 관련하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로 대표되는 “낭만과 의지의 역학”을 언급한 다음, 강과 바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투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윤극영에게 이 경쾌한 ‘고기잡이’는 앞으로 오게 될 시대의 주인인 아이들이 거대한 강하나 난바다에서 벌이기를 기대하는 모험의 도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대해의 모험은 계획단계에서부터 한 나절에 끝날 소풍으로 축약된다. 고기잡이에 참여할 수 없는 어른, 현실의 비루함과 야만스러움을 그만큼 크게 느끼는 어른의 심려가 아이들이 현실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아이들과 현실의 대면을 꺼리는 어른의 검열은 자주 아이들이 해야 할 생각을 어른이 대신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윤극영의 동요에서 아이들은 진정한 개인으로 등장하거나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의 동요에서 사물에 대한 정서는 한 아이가 특정한 정황에서 특별한 깊이로 획득하는 정서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모든 정황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정서이다. 이는 그에게 사물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어떤 미미한 물건과 생활사에서도 적절한 시취를 끌어낼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와 문화가 병들어 있는 시대에 어떤 종류의 날카로운 감각도 현실에 대한 불행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아는 그는 칼을 갑 속에 묻듯 감각의 날을 다스렸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끔찍한 장면 앞에서 어린애들의 눈을 가린 것과 같은 행위였다.

그는 한 아이가 느낄 수도 있을 깊은 감각을 현실과 함께 괄호 속에 묶어 두었다. 감각은 인간이 현실과 만나는 접점이며, 그 깊이는 곧 불안과 비애와 절망감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마음의 균형과 분별력을 잃을 것이 두려워 아이를 결코 무대에 등장시키지 않았던 서양 고전주의자들을 닮았다. 그러나 고전주의자들이 염려한 것은 어른이었지만 우리의 동요 작가가 염려한 것은 아이였다.

윤극영은 말년에 이르러 드물게나마 자연에 대한 선연한 감정을 아이의 독자적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를 썼다. 다음은 ‘꽃길’의 전문이다.

엄마 하고 불렀더니

아빠 얼굴 떠오르고

아빠 하고 불렀더니

엄마가 웃으며 달려 오신다

왜 안 그래

산이 산이 높아도 물 속에 깃들고

물이 물이 깊어도 그 소리 산을 넘는데

바람은 울긋불긋 무지개다리

옥이야 철이야 모두 오너라

줄 대어 그 위에서 발을 구르면

무겁다곤 안 할거야 떠받쳐 줄거야

좋아라 가락 높여 삼천리 꽃길을 가자

이 동시는 아이를 격려하는 어른의 교훈적인 목소리로 마지막 연을 마감하고 있지만, 가족 간의 기이할 정도로 깊은 정을 자연에 대한 색다른 시선과 일치시키는 시선은 분명 제 감정의 깊이를 스스로 짚을 줄 아는 한 아이의 것이다.

어린이들이 어린이가 되고, 자연 사물에 대한 독자적 감각의 획득이 자아의 발견과 일치되기까지 이렇듯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윤극영에게서 한 민족의 장래가 한 아이의 자아로 발전되는 이 과정은 한국현대문학의 전개과정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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