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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쓴 편지] 경계의 상징 文人石

입력
2014.12.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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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쓴 편지

경계의 상징 文人石

서울 노원구 월계동과 도봉구 창동에 걸쳐 있는 초안산(楚安山)에는 조선시대 내시들의 무덤이 일반 묘와 섞여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돌보는 후손이 없어 흉물로 변했지만 일반적인 남향의 묘와 달리 궁궐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죽어서도 임금을 향하는 충성심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기본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은 임금을 가장 가까이 보좌하던 종 2품 상선 등 내시들의 인원과 할 일을 명시해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했다. 삼강행실을 익히고 시험을 통해 근무평가까지 받았던 이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우거진 잡풀에 육신을 누인 내시들 옆에는 석상이 세워져 묘를 수호했다. 본분을 잊은 일탈을 경계라도 하듯 초안산 비석골 근린공원의 문인석(文人石)들이 시공을 초월해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노원구 월계동 비석골 근린공원의 내시묘 문인석과 석상들
노원구 월계동 비석골 근린공원의 내시묘 문인석과 석상들
초안산 깊은 숲속에 은둔한 문인석 뒤편으로 방치 된 묘가 보인다.
초안산 깊은 숲속에 은둔한 문인석 뒤편으로 방치 된 묘가 보인다.
자신이 지키던 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지키던 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TV에서 그려진 내시의 모습은 항상 구부정한 허리에 왜소한 체격보다 큰 옷을 입고 비염섞인 목소리를 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다. 하지만 내시라는 직책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임금의 측근으로 항상 지근거리에 있어야 하는 까닭에 거세를 해야 했고 자질 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와 소학, 삼강행실 교육은 물론, 매달 시험을 치르고 일 년에 한번씩 근무평가도 받아야 했다. 중국의 환관들은 황제의 공문서위조 등을 막기 위해 글을 쓸 줄 모르게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우리의 내시들이 더 뛰어난 인재라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임금들도 내시들에게는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했다. 바로 옆에서 자신을 보필한 내시들에게 중국의 환관들과는 달리 혼인을 허락하고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 허락됐지만 권력욕에 눈이 먼 사대부들이 자기 딸을 시집 보내 출세를 위한 줄을 대는 부작용이 생기자 내시와 혼사를 한 사대부는 성밖으로 내보냈으며 내시가 죽은 후에야 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조선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었던 경국대전에도 내시들의 인원과 할 일을 명시해 엄격히 관리했다. 총 140명 내관들의 수장이자 왕의 최측근이었던 상선(尙膳)은 종2품 환관직으로 같은 품계로는 대사헌, 참판, 직제학, 관찰사 등이 있다.

왕의 측근이었지만 절대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내시들이 한해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에 문고리 권력, 십상시 모임 등의 유령 같은 존재로 언론과 국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십상시’ 란 중국 후한 말 영제(156-189)시대, 정권을 잡아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10명의 환관을 지칭하는 말로 ‘후한서’에는 12명, ‘삼국지연의’에는 10명으로 전해진다. 문고리 권력의 사전적 의미는 “권세가에게 빌붙어 권세가 이상의 행동으로 실리를 취하는 실세 중의 실세”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문고리권력과 십상시 표현 등의 소식을 접하는 무덤 속 내시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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