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의 민주화 로드맵
1997년 인니 개발독재 모방 나서, 2011년 테인 체제 출범으로 마무리
민주주의 최대 걸림돌 2008년 헌법
아웅산 수치 의식 대통령 후보 조건에 배우자·직계가족은 미얀마인 조항
국제사회 비판받는 아웅산 수치
2012년 보궐선거서 의원 당선된 후 민족·종교 분쟁에 소극적 목소리
지난 11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ESAN) 의장국인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미얀마는 인권탄압국이라는 오명 때문에 의장국 지위를 포기한 적도 있다. 1997년 아세안 가입 이후 올해 처음 의장국 지위를 누린 의미 있는 자리였다.
테인 세인 대통령, 화해의 시대를 열다
미얀마가 올해 아세안 의장국으로 결정된 것은 2011년 11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였다. 테인 세인 미얀마 정부가 정치개방과 경제개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미얀마 국토는 한반도의 3배 정도 크기다. 국경선은 인도와 중국 방글라데시 태국 라오스 5개국과 접하고 있다. 미얀마는 또 다종족 사회다. 버마족이 70% 가량이며 샨족, 카렌족 등 135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 인구의 75%가량은 빈곤선 이하 상태에 있다. 특히 상당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미얀마를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로 지목한 바 있다.
그렇지만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미얀마는 이제 변화와 가능성의 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 변화의 주역은 2011년 3월에 취임한 테인 세인 대통령이다. 비교적 청렴하게 평가되던 장성 출신의 테인은 2011년 8월 민족민주동맹(NLD) 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만나 정치개혁에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화해의 시대’의 서막은 2개월 뒤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10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여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으며 노조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노동법과 집회 허용 법령이 속속 통과됐다. 또 언론 검열이 대폭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일관되게 제도권 진입을 거부하면서 테인 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NLD가 제도권 정치 참여를 결정했다.
2012년 4월 1일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치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가 이끄는 NLD가 44석 중 43석을 획득했다. 서방은 즉각 테인 정부의 정치개혁에 대한 화답차원에서 미얀마 고위급 관료들에 대한 비자발급을 재개하고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등 기존의 대결노선을 수정하였다.
군정 하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던 아웅산 수치는 2012년 북한과 함께 미얀마를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칭했던 미국을 방문해서는 경제제재 완화를 요청하였다. 2012년 11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미얀마를 처음 방문한 버락 오바마는 테인 정부의 개혁·개방을 지지하면서 북한 역시 이 같은 변화를 선택할 경우 손길을 내밀 용의가 있음을 시사했다. 미얀마의 개혁·개방 모델을 공개적으로 격찬한 것이다.
‘미얀마 모델’의 기원과 한계
미얀마는 70여 년 동안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은 전형적인 분할지배 정책을 폈고 이것이 독립 이후 종족간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은 1947년 7월 소수종족과의 평화공존을 꾀하는 연방주의 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에 의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1962년 종족간 내전 상황에서 떠오른 네윈 장군이 이끄는 쿠테타 세력의 ‘버마(미얀마)식 사회주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영국자본을 몰아내는 등 철저하게 폐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벽한 실패였다. 경제도 민주주의도 추락했다. 1988년 8월 8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중봉기가 일어났고 군부는 유혈진압으로 대응했다. 회유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1990년 5월 선거가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자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권력이양을 거부하였다.
당시 미얀마 군부 엘리트들의 시야에 들어온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30년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인도네시아를 신흥공업국 반열에 올려놓은 수하르토 군정체제가 눈에 띈 것이다. 1995년 6월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탄쉐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했고 2년 뒤에는 수하르토가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미얀마 군부는 인도네시아 개발독재 모방에 나섰다. 이는 ‘규율민주주의로의 이행 로드맵’으로 구체화 됐다. 2008년 군부는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피해가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이 로드맵에 따라 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강행했고 국민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고 공표했다.
로드맵의 5단계에 해당하는 2010년 11월 총선이 예상대로 군부 측 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자 군부는 아웅산 수치를 가택연금 상태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로드맵의 마지막 단계로서 군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형식상 민간정부인 테인 체제가 2011년 3월 출범하였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개혁·개방은 군부의 주도하에 주도면밀하게 추진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지난 2012년 보궐선거에서 NLD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의석 수는 총 의석수의 7%에도 못 미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걸림돌은 2008년 헌법이다. 이 법은 군부의 정치참여와 규율을 전제로 한 다당제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전체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도록 명시했고 군에 대통령 후보 추천권한을 주고 있다. 대통령 선거도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다. 특히 영국인 남편을 두었던 아웅산 수치를 의식해 대통령 후보자의 자격조건으로 배우자와 직계가족이 미얀마인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아웅산 수치의 딜레마
올해 미얀마를 다시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무슬림 소수종족인 로힝야족의 인권문제 해결과 함께 아웅산의 대선 출마를 막고 있는 현행 헌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미국 등 서방진영이 미얀마를 향해 ‘고립을 통한 변화’를 꾀하였다면 아세안은 ‘포용을 통한 변화’를 꾀하였다. 아세안은 미얀마 군사정부의 민주화 이행 로드맵에 따라 진행된 2010년 총선을 지지했고, 2011년 신정부 출범을 민주화로 가는 바람직한 경로로 평가했다. 1997년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과 2014년 아세안 의장국 수임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기도 했다. 아세안이 미국 등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끌어들일 때의 명분은 내정불간섭, 주권동등, 지역 자율성 견지 등이다. 아세안 방식(ASEAN way)에 따라 미얀마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세안과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화 세력의 관계는 서먹할 수밖에 없다. 한때 미얀마 민주화 세력들은 군정 하의 미얀마를 향한 아세안의 포용정책이 최악의 인권 현실을 무시한다며 국익우선의 실리주의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NLD 지도부가 2015년 선거를 앞두고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박해문제를 두고 국제인권단체들로부터 정치 실리주의로 대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아웅산 수치가 2012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된 뒤 종족?종교분쟁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데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버마종족의 표를 의식해 이동의 자유가 없고 산아제한마저 강요 받는 로힝야족의 인권문제에 대해 아웅산 수치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 거주하는 로힝야족은 70만~14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은 미얀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와의 갈등을 빚고 있다. 불교로의 개종 강요, 시민권 박탈 등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미얀마를 탈출하는 로힝야족이 하루 평균 900명에 달한다는 보고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국제인권단체들에게 아웅산 수치와 NLD는 더 이상 인권과 민주주의의 아이콘이 아니다. 아세안의 보수적 행보를 비판했던 아웅산 측이 이제는 군부의 환심을 사고 더 많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 속에서 보수적 행보를 자처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실리적 접근을 비판만 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다.
내년 2015년 선거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화해의 시대가 더 많은 진보를 가져올지 아니면 보수로 귀결될지를 가늠하는 중대국면이 될 것이다. 반세기 가량 북한과 함께 ‘은둔의 나라’, 시간이 정지된 나라’로 알려진 미얀마의 개혁·개방을 단행한 군부 엘리트들이 이미 대세가 된 현재의 국면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ㆍ민주주의연구소 부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