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트라우마’가 만든 폐쇄적 인간관계
‘문고리 권력’ 전횡 모르고 싸고 돌기만
나만 옳다는 독선과 고집에서 벗어나야
2010년 세종시 수정 논란이 벌어졌을 때 한나라당 대표인 정몽준 의원이 고사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을 들어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공격했다. “미생이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익사했다.” 그러자 박 전 대표가 맞받아쳤다. “미생에겐 진정성이 있었고 연인에게 진정성이 없었다. 약속을 지킨 미생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는가. 그는 죽었지만 신뢰를 지킨 귀감이 된 것이다.” 이 논쟁에서 정몽준은 완패했고 박근혜는 신의를 소중히 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은 박 대통령에게 ‘배신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대통령일 땐 한자리 얻어보려고 구름처럼 모였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런 경험은 박 대통령을 주변 사람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폐쇄적 성향으로 이끌었다. 18년 간의 칩거를 끝내고 1998년 정계에 입문할 때 자신을 도왔던 사람이 정윤회와 ‘청와대 비서관 3인방’이다. 어렵고 외로울 때부터 줄곧 곁을 지켜온 그들에게 박 대통령이 가족 이상의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할 법도 하다.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신분에 머물렀다면 보좌진과의 이런 관계는 미담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진 지도자다. 개인적인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인간관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뿐더러 국정운용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이번 파문은 정씨와 비서관 3인방 등 측근 세력과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회장간 권력다툼이 발단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 정치의 전근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권마다 핵심 측근과 친인척간 갈등은 늘 있어왔다. 대통령을 만든 측근들은 친인척들의 권력 사유화를 막으려 하고 친인척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측근들을 견제하려 한다. 두 세력이 충돌할 때 중요한 건 대통령의 태도다. 어느 쪽이든 실세로 군림하며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할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
박 대통령은 동생 박 회장이 “누나가 무섭다”고 말할 정도로 각별히 단도리 한 듯하다. 그러나 똑같이 단속해야 할 측근들의 전횡 가능성에는 촉수를 뻗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그들은 일개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다”이라고 두둔했지만 심부름꾼이어야 할 측근들이 대통령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마음대로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실상은 알지 못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행적을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했던 답변도 지금 와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달 후면 박 대통령은 집권 3년 차를 맞는다. 첫해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2년 차는 세월호 참사로 흘려 보냈는데 이제 다시 측근들의 권력투쟁으로 발목이 잡혔다.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로 정했던 경제 살리기와 공무원연금 개혁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자신이 누누이 강조해온 공직사회 개혁은 “청와대 집안 단속이나 제대로 하라”는 비아냥에 힘을 잃었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급속히 레임덕으로 빠져드느냐, 아니면 인적 쇄신을 통해 동력을 회복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있다. 박 대통령은 그제 당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남들이 모두 잘못됐다고 얘기하는데도 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박 대통령의 맹목적인 자기 확신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박 대통령은 1991년 2월 21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인간의 가장 큰 병통은 오만이라고 했는데, 사람 마음을 병들게 하고 비뚜로 나가게 하는 근원은 항상 여기에 있다. 우쭐하는 데서 시작되는 이 마음의 병은 눈과 귀를 막아 간신, 충신을 구별 못하게 하고 충언과 아첨 등을 구분 못하게 한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오만이나 독선의 길로 가고 있지 않은지 헤아리기 바란다. 대통령이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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