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은 김진태 검찰총장이 취임 1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김진태 총장은 1주년 소회로“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 관계인을 차별하거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의 이 말은 그러나 무기력하게, 한편으로는 안쓰럽게도 들렸다. 당일 아침 조간신문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의혹에 대해 “내용은 루머”“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라고 발언한 내용이 일제히 실렸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비선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은 사실이 아니니, 이를 보도한 기자들과 청와대 문건 유출자를 처벌하라는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수사 착수 일주일 가량 흐른 7일에도 “찌라시(정보지)에나 나오는 이야기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검찰의 어려움은, 대통령의 노골적인 압력뿐만은 아니다. 사안 자체가 수사로 정리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누구라도 정리를 해야 하니 떠밀려서(고소로 인해) 검찰이 나서기는 했지만, 검찰이 개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 사안인지 의문이 든다.
우선 ‘청와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에 대한 수사(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는 국제적인 망신이 됐던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일본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기소건과 기본적으로 같은 성격이다. 명예훼손죄는 대다수 선진국에서 사라지거나 사문화됐고 유엔도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부실한 기사를 견제한다는 이유로 형사상 처벌을 일반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감시를 주요 임무로 하는 언론 자유의 위축을 부른다.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정정보도 청구, 민사 소송 등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가토 전 지국장을 재판에 넘겼을 때 나왔던 비판은 이 사안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당시 진보성향의 일본 유력지인 아사히신문은 “보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권이 힘으로 내리누르는 것은 폭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아사히신문은 “풍문을 안이하게 쓴 산케이신문의 보도 자세는 반성해야 한다”면서도 “당국이 기자를 출석시켜 조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세계 선진국의 상식에서 보면 공권력에 의한 위압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마이니치신문이 “보도 내용에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박 대통령은 공인 중의 공인이어서 반론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며 “징벌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하는 방식은 언론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고 했다.
더 나아가 검찰이 “정씨가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들과 정기 모임을 갖고 국정에 개입했다는 문건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한다고 여론이 잠잠해질까. 청와대의 바람과 달리, 가토 전 지국장은 일본에서 ‘스타’가 됐으며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한 산케이 신문 기사 내용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언급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세계일보 기자들을 기소한다고 해도 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더구나 비선실세 논란은 이미 문제의 문건 내용을 넘어섰다. 박 대통령이 지난 해 문화체육관광부 국ㆍ과장을 콕 집어 “나쁜 사람”이라고 교체를 지시했다는 것은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인정한 사실이다. 정씨가 승마선수인 딸의 판정결과에 불만을 가졌고, 이후 승마협회가 조사한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관련 공무원에게 벌어진 인사 전횡이라는 의혹이다. 이처럼 무한정 확장되고 있는 국정농단 정황과 암투, 인사 파동 등이 청와대의 쇄신과 반성 없이 어떤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검찰에 이를 떠맡기는 것은 정권의 무책임이다. 국정농단으로 나라를 망친다고 해도 범죄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고, 물적 증거가 나오기도 어렵다.
덧붙여 문건유출 처벌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박 대통령은 이번 문건유출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검찰은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청와대 비서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유출한 혐의에 대해 벌금 5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당시 대화록 유출 사건도 대선정국을 뒤흔들 정도로 큰 사건이었지만, 검찰은 ‘봐주기’로 끝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한 김진태 총장이 청와대의 압력 속에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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