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 있는 저자ㆍ역자들의 책
몇몇 대형 출판사에 쏠림 현상 속
1인ㆍ소형 출판사들 역작 돋보여
최종 수상작 27일 발표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제 55회 한국출판문화상의 5개 부문 수상 후보작 54종이 선정됐다. 11월 29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열린 예심에서 심사위원들은 저술 부문에서 교양서 10종과 학술서 11종을 비롯해 번역서 10종, 기획ㆍ편집ㆍ디자인 등을 두루 살펴 잘 ‘만든’ 책을 뽑는 편집 부문에 11종과 어린이청소년 도서 12종을 후보작에 올렸다.
이번 한국출판문화상에는 195개 출판사 총 917종이 응모했다. 이는 예년보다 줄어든 규모인데, 참여가 부진했다기보다는 ‘자신 있는’ 책으로 응모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예년에는 일단 응모하고 보자는 책이 많았다.
응모작 중에는 하나의 책으로 저술과 편집 양쪽에 응모하는 등 2개 분야 동시 응모작이 상당수 있었다. 좋은 책이면서 잘 만든 책이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사례다. 출간 종수가 많은 대형 출판사들은 한꺼번에 10종 이상 응모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되도록 여러 출판사를 고루 선정하려고 노력했으나 2종 이상 선정된 출판사가 10군데로 나타났다. 쏠림 현상으로 보여 재심을 검토했으나 현단계 한국 출판의 지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지표라고 판단해 그대로 확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헤이북스, 상출판사 등 신생 1인 출판사를 포함해 작은 출판사들의 책이 여러 종 선정된 것은 이번 예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결과 중 하나다.
최종 수상작(부문별 1종)은 27일자 한국일보에 발표한다.
이번 예심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현우ㆍ서평가 ▦금정연ㆍ서평가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김지은ㆍ아동문학평론가 ▦변정수ㆍ출판평론가 ▦안찬수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심사평]
이현우ㆍ서평가
올해 예심은 심사위원들에게 중복 추천을 받은 책이 많아서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만큼 후보에 오른 책들이 두드러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후보를 다툴 만한 경합작이 많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저술의 교양서 부문은 선정된 후보작 10종 중 과학책이 3종을 차지해 눈에 띈다. 번역서 위주이던 교양 과학서 분야에서 몇 년 전부터 좋은 국내서들이 나오고 있는데, 여러 모로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사회학 분야의 책들도 눈길을 끄는데, 후보에 오른 ‘모멸감’, ‘세상물정의 사회학’,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모두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한 시도로 좋은 평을 얻었다. 1930년대 친일토벌부대를 다룬 ‘간도특설대’와 코카콜라의 문화사를 다룬 ‘욕망의 코카콜라’, 한국 사회에서 자살이 갖는 의미를 추적한 ‘자살론’ 등은 독특한 소재를 다루면서 교양서의 시야를 확장해준 점이 평가되었다. ‘공부 논쟁’은 대담집으로는 드물게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는데, 해마다 입시전쟁을 치르는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저술의 학술서 분야는 각기 다른 전문 분야의 책들을 동일한 척도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매번 고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소재를 다루거나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 저작에 높은 점수가 주어졌다. 특히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은 방대한 분량과 함께 저자의 오랜 노고가 심사위원들의 경탄을 낳았다.
변정수ㆍ출판평론가
지난해에도 출판 양극화의 조짐을 우려했는데, 올해는 이러한 추세가 아예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심각한 양상이다. 중량감 있는 타이틀이 전반적으로 더욱 확연하게 줄어든 와중에도 역량 있는 저자 또는 역자의 책이 전 분야에 걸쳐 몇몇 출판사에 편중되고 있다. 다만 이를 대형 출판사들의 과점으로 단순화할 수만은 없으며, 오히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중견 출판사들의 활약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좀더 깊이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이렇듯 극심한 ‘쏠림’이 드러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 ‘아주 작은’ 출판사들(개마고원, 궁리, 오월의봄, 지호, 천년의상상, 후마니타스, 에이도스, 상, 헤이북스)에게 더 큰 격려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들의 분투야말로 출판 다양성의 위축과 출판 생태계 황폐화를 방어하는 최전선일 것이다.
금정연ㆍ서평가
번역 부문에서 선정된 후보작에는 과학 분야 책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묵직한 저작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과학 분야 전문 번역자들의 작업이 올해도 돋보였다. 해외에서 화제가 된 책들이 번역 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남미 최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이 번역된 것이 가장 반가웠다. 열일곱 권으로 완간된 볼라뇨 선집이 있어 ‘2666’이 더욱 큰 울림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중요한 현대 작가들도 한두 권의 대표작이 아닌 전집이나 선집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 부문에서는 책에 쏟은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획들이 눈에 띄었다. 나날이 어려워지는 출판 환경 속에서 유명 저자의 명성에 기대거나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며 묵묵히 좋은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정모ㆍ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한국은 적어도 과학 분야의 경우 번역자 복이 많은 나라다. 김명남, 김명주, 노승영 같은 젊은 번역자들이 활약하는 과학책 시장에 양병찬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특히 그는 과학자들이 번역자로 지명해서 불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올해처럼 뛰어난 과학 저술이 쏟아져 나온 해도 아마 없을 것이다. 대중교양서의 수준은 선진국가가 판권을 사서 출간해야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는가 하면, 과학자들이 교양서의 틀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 과학은 소재로만 등장하는 수필이 있는가 하면, 교과서에 절대 실릴 이유가 없는 한국의 고천문학에 관한 책도 나왔다. 시장은 점차 작아지지만 수준은 급격히 오르고 있다. 이런 위안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찬수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책 한 권 한 권은 저자, 번역자, 발행인, 편집자, 디자이너, 화가, 제작자 등이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그중 일부를 수상 후보작으로 뽑는 게 쉽지 않았다.
응모작들을 살펴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출판의 사회 비판적 기능이 살아있는 책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언론 지형은 기우뚱하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폭넓게 조망하거나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야를 제공하는 담론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출판은 미디어로서 각종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공론장 역할도 떠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책들이 더욱 간절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출판문화상은 이미 그 역사가 반 세기를 넘긴 유서 깊은 상이면서 한국의 출판 관련 시상 제도 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띤 상이다. 응모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정하는 출판상으로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상이 오랜 전통에 걸맞게 좀 더 권위를 갖고 독서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출판과 독서 관련 종사자들이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한국출판문화상은 한국일보라는 한 신문사가 주최하는 상을 넘어 한국 현대 출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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