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로 가는 길목 세이켄지에 시구·그림 등 10여점 남아 있어
한일 지자체 등 관련 유적·유물 유네스코 기록유산 공동등재 추진
"양국 관계 개선 계기 됐으면…"
임진왜란 이후 한일 양국의 평화사절단 역할을 했던 조선통신사가 최근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양국 지자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과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및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주일 한국대사관이 4일 한일 양국 언론을 대상으로 일본 시즈오카(靜岡)현내 세이켄지(淸見寺), 삿타토게(さった峠), 호타이지(寶泰寺) 등 조선통신사 유적을 둘러보는 탐방 행사를 가졌다. 조선통신사 전문 연구가인 김양기 전 시즈오카현립대 교수의 안내로 시대를 뛰어넘는 바람직한 한일 외교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외교 사절단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매번 400~500명에 달하는 대행렬이 한성-부산-시모노세키-오사카-교토-나고야-슨푸(시즈오카)-에도(도쿄)에 이르는 왕복 4,300km의 대장정을 거치며 숱한 이야기와 족적을 남겼다.
세이켄지는 이 중에서도 역대 통신사들이 최고의 절집으로 손꼽은 명찰이다. 1764년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서기 성태중은 “내가 일본에 온 후 허다한 산수를 보았지만…(중략) 세이켄지는 제일의 유명한 가람이요…(중략) 후지산은 제일의 명산이다”라고 극찬을 했다. 세이켄지는 후지산의 가장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호(三保)의 마쓰바라(松原)를 굽어볼 수 있는 도카이(東海) 해안가에 건립된 사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후 천하통일 위업을 달성하고, 조선과의 화친 차원에서 통신사 왕래를 제안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켄지를 필수 방문코스로 직접 추천했다고 한다. 세이켄지가 위치한 시즈오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뒤, 절치부심하며 지내던 곳이다. 그는 천하 평정을 이룬 뒤 아들에게 쇼군직위를 물려주고 슨푸성에 거주하며 에도와 교토를 사실상 지배하는 이원집정제를 실현했다.
지금은 절 앞으로 고속도로와 철도가 지나고, 바다 앞을 매립, 컨테이너 야적장이 들어서 당시 통신사가 느꼈던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사찰내에 오백나한상과 범종 등이 들어서있어 절집의 내공이 만만치 않았음을 가늠케 한다.
본전 앞에 대담한 필체로 휘갈겨 쓴 흥국(興國)이라는 글자의 현판액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본이 흥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조선통신사가 남긴 글이다. 범종을 보관하는 종루에 걸린 ‘경요세계(瓊瑤世界)’라는 판액은 1643년 통신사 제술관 박안기가 남겼다. 한일 양국을 상징하는 두 개의 구슬이 화합하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대강당이 있는 방장에 들어서니 이 곳은 숫제 조선통신사 유물 박물관이다. 나무에 새긴 10여점의 시구와 현판에 세이켄지 주변의 수려한 풍광을 남겼다.
일본의 지역 유지들은 통신사가 머무는 곳을 찾아, 이들에게 글이나 그림을 청하기도 했다. 1764년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참가한 화가 김유성은 세이켄지가 한국의 낙산사와 유사하다고 글로서 극찬하자, 일본 측이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김유성은 수묵화는 6점을 남겼고, 이중 낙산사와 금강산 그림 등 4점이 남아있다.
이들의 정겨운 필담을 통해 전쟁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도쿠가와의 통신사 외교를 평화외교라고 칭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융숭했다. 정사, 부사, 종사관등 고위급 통신사에게는 도미, 전복, 민물장어 등이 포함된 1식15찬 식사가 제공됐다. 김양기 교수는 “도쿠가와 막부가 통신사절 환대에 쓴 비용은 100만냥을 넘은 적도 있다”며 “당시 막부의 1년 예산이 70만냥임을 감안하면 통신사의 대접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전했다.
삿타토게는 시즈오카에서 꿀 같은 휴식을 취한 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도중 만나는 가장 험난한 고개였다. 당초 에도로 향하는 별도의 길이 있었으나 낙석이 자주 떨어져 인명 피해가 자주 발생하자, 1655년 통신사의 안전을 위해 산중턱에 새롭게 길을 냈다. 지팡이를 짚고 올라야 할 정도로 가파른 소로가 이어지는 가 싶더니 일순 눈 덮인 후지산과 해안 절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날은 아쉽게도 구름이 가려 후지산을 조망할 수는 없었지만, 맑은 날 찍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가실 정도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렇게 낸 길을 각 지역 영주(번)의 다이묘들이 에도를 오가는 참근교대(參勤交代)에 이용토록 해 정권 유지에 활용했다.
통신사절단이 휴식을 취했던 호타이지에도 통신사와 일본인이 필담을 나눴던 다양한 문서가 남아있다. 호타이지는 특히 조선통신사 방문 400주년을 기념, 2007년 ‘통신사 평화 상야등’이라는 석등을 제작했다. 기본적은 틀은 경기 여주의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282호)을 모델로 삼았고, 석재는 경북 영주산의 화강삼을 가져다 썼다. 석등 내부의 불은 히로시마의 원폭화에서 채화, 평화의 의미를 더했다.
임진왜란으로 멀어진 한일 양국 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작업도 한창이다. 지난 달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시에서 통신사와 연관이 있는 자치단체와 민간 단체가 만든 조선통신사 인연지 연락협의회 총회가 열려, 관련 유적과 유물을 2016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한일 양국이 공동 신청하기로 확인했다. 협의회측은 내년 2월까지 신청 대상이 될 문서, 에마키(繪卷ㆍ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두루마리 형태의 책) 등 선별 작업을 벌이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견해 차이도 있다. 한국은 통신사를 통해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켰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반면, 일부 일본 우익세력은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일본에 대한 조공행위로 식민지 지배의 합리화 이론으로 삼고 있다.
김 교수는 “양국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 이웃한 국가의 대규모 사절단이 20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교류를 하며 다양한 이야기와 족적을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보기 어려운 소중한 유산”이라며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해 양국이 손잡고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고 양국간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즈오카현=글·사진 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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