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산 예술가의 이야기는 듣기 즐겁다. 어른이 될 권리를 뺏긴 것이 분명한 이들은 꾸짖는 대신 투덜대고, 위대한 이념보다 잘 무친 나물에 전율하고, 자서전을 쓸 힘으로 여인의 벗은 몸을 그린다.

원로 소설가 이제하씨의 산문집 ‘모란, 동백’(이야기가있는집)이 나왔다. 2011년부터 최근까지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에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을 삽입했다. 1957년 ‘신태양’에 소설 ‘황색 강아지’로 등단한 작가는 문학, 미술, 영화, 음악 등 예술의 전방위에서 활동했으나 늘 변방을 고집했다. 당대의 상식에 흠뻑 젖지 않은 그의 글은 편가르기를 그만 두고 잠깐 쉬어가기에 제격이다. 작가는 인권 대신 정이 지배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추억하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심정을 떠올린다. 그림과 여자, 음식에 대한 줄기찬 애착을 드러내는가 하면 정치적 이유로 한 문예지에 소설 연재를 거부 당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한다.

‘아현동’은 아현동 고가도로 철거 소식을 들은 작가의 추억담이다. “아현동 고가도로가 헐린다. 버스를 타면 열린 차창 틈새로 지팡이를 쑤시며 ‘돈 내! 돈 내!’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초여름 졸음에 겨웠던 승객들은 불의에 어깨와 허리를 찔리고 화들짝 놀라 그 호방한 막가파식 구걸에 도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벌어 애들 대학까지 보낸다고 했다. 서촌 터줏대감 15년, 그 이력 중에 ‘돈’이란 단어가 이처럼 유쾌하게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작가가 졸지에 가수로 ‘데뷔’하게 된 노래 ‘모란 동백’의 탄생 배경도 나온다.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해 유명해진 이 노래의 원제는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다. 1998년 환갑을 맞은 작가를 위해 지인들이 CD를 제작한다고 하자 그는 부랴부랴 곡을 쓰고 열 편의 시를 골라 가사를 붙였다. 리듬감 때문에 미당의 시 ‘노을’의 ‘붉은 두 볼’을 ‘붉은 두 뺨’으로 고칠 수 밖에 없었던 것,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조두남의 곡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이 너무 좋아 제목에 몽땅 밀어 넣은 사연 등이다.

책은 작가가 등단 57년 만에 처음 내는 산문집이다. 작가의 말에선 대중을 향한 점잖고도 수줍은 소통의 제안이 느껴진다. “사람들끼리 만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나는 잘 모른다.(…)공원이든 광장이든 혹은 외롭게 홀로 읊조리는 독백의 장소든 어쨌든 타인과 한치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그럴 것이다. 여기 모은 글과 그림들은, 물론 그 갈망의 소산들일 것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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