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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월급 120만원과 세계의 비참

입력
2014.12.0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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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 근로자라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월 급여는 얼마인가. 사람마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게 돈의 본질적 속성이므로, 체감의 기준은 제 각각일 것이다. 올해 대졸 신입사원 초임 평균이 278만원이고,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은 것도 오랜 일이니, 200만원 미만 어디쯤, 대략 150만~200만원 사이가 저임금의 실질적 하한선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했다. 대형마트 10년차 비정규직 월급이 온갖 수당을 포함하고도 110만원이 안 된다는 데 분개하고,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지 않는 아파트 경비원이 월 100만원도 못 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내 사고의 지형 속에서 그들은 대체로 소수적 예외로 주변화되곤 했다. ‘저임금’, ‘저소득’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일부’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는 명사였고, 양극화니 어쩌니 해도, 나는 여전히 중산층이 다소나마 불룩한 다이아몬드형 다이어그램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틀렸다. 월 급여 200만원 미만은 결코 주변부가 아니었다. 10월말 발표된 통계청의 ‘2014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기사를 보고 나는 대경실색했다. 대한민국 임금근로자 1,800만명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는 임금이 월 100만~200만원 미만이었다. 무려 37.3%, 그러니까 매일 아침 출근해 늦은 저녁 퇴근하는 직장인 10명 중 4명이 100만원대의 월급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월 100만원 미만의 임금근로자 12.4%를 더하면 월급쟁이 절반이 한 달에 200만원을 못 벌고 있는 셈이다. 200만~300만원의 월급은 임금근로자 전체의 24.8%만이 받을 수 있는 상당한 ‘고임금’이고, 300만~400만원은 13.1%, 400만원 이상은 12.4%밖에 안 되는데, 나는 그동안 이 ‘고임금 근로자’들을 평균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언어가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경우야 수다하지만, 이처럼 치명적 기만이 있을 수 있을까. 임금근로자 절반이 받는 급여를 어떻게 저임금으로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오래 생각했다. 도대체 100만원대의,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50%의 임금근로자들은 어디에 있나. 나의 세계인식은 왜 이렇게 허술하고 그릇됐나. 주변에 슬금슬금 물어보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큰 아이가 다니는 공립유치원 급식실 파업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학교 비정규직 조리원은 1일 8시간을 근무하고 일당 4만6,770원을 받는다. 근무일 275일을 곱해 12개월로 나누면 월 107만원. 둘째가 다니는 민간 어린이집 보육교사 초임은 109만원, 여기에 정부의 처우개선보조금 등 각종 지원금이 붙으면 대략 140만~150만원. 친척 동생이 일하는 백화점 매장의 판매원 초임은 120만원 전후, 자주 가는 동네 커피전문점의 바리스타는 매니저급임에도 초임 약 110만원…. 120만원 안팎의 월급이 도처에 매복하고 있었다. 내가 몰랐을 뿐, 올해 최저임금 5,210원에서 달랑 몇 백원을 더 얹은, 이 인간존엄을 말살하는 노동가치의 환산액이 노동시장에는 이미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값이 도대체가 사람값이 아니라는 것. 세계의 모든 비참은 여기서 비롯됐다.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한 달에 200만원도 못 버니, 결혼 출산 육아 교육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도 네 능력이 그것뿐인 걸 어떡하냐고, 억울하면 공부 잘해서 출세하지 그랬냐고 도처에서 막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사교육에 목숨 걸지만, 대부분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끔찍한 악순환. 능력주의는 이제 이 땅에서 괴물이 됐다. 세상의 어떤 하잘것없는 능력도 한 시간 투여한 결과가 5,210원일 수는 없는데, 놀랍고도 슬프게도 모두가 능력주의를 수긍한다.

기업 사내보유금이 500조가 넘고, 실질임금 증가율은 0%대에 들어섰으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아직도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기사가 쏟아진다. 그 대책 없이 쌓인 돈, 임금으로 풀어주시면 좋으련만, 자영업자부터 대기업 CEO까지 세상의 모든 사장님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월급 올려주세요”니 난망이다. 이럴 때 쓰라고 정부가 있는 것인데, 대책이라고 나온 게 ‘정규직 과보호 완화’란다. 우리가 잘못했다. 애를 너무 많이 낳았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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