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아들이 낯설어지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다 내가 이 녀석이랑 이렇게 엮였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이 아이를 세상에 나게 한 게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까지 드는 증상이다.(이게 육아우울증?) 아들과 보내는 하루하루는 즐겁다. 손주 뛰노는 모습에 기뻐하시는 어른들을 떠올리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비로소 장손의 기능(?)을 했다 싶다. 하지만 어린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몸이 뻣뻣해진다.
괜찮은 어린이집은 10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기자가 밀려 있다. 그나마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곳에는 제 자식 끼워 넣기 위한 치맛바람이 태풍을 이룬다는 이야기에 숨이 컥컥 막힌다. 어디 이 뿐인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취업, 결혼…. 어느 것 하나 쉬 넘길 수 없는 관문들이 아들 인생 앞으로 도열해 있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하고 있고 해수면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분쟁도 빈번해지고 있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은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군사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런’ 세상에 아들을 내놓은 게 잘한 일이냐는 것이다.

험한 세상에 아들을 내놓았다는 죄책감 아닌 죄책감 때문인지, 요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온 몸이 착 가라앉으며 무기력해지는 증상도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육아우울증의 하나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들 들으라고 집이나 차에서 틀어주는 동요 가사에 울컥하는 나를 발견한다.(이 땐 나도 적잖게 당황스럽다.)
대표적인 곡이 ‘아빠 힘내세요’다. '딩동댕 소리에 얼른 문을 열었더니' 로 시작하는 이 노래에 등장하는 아빠는 정말 힘겹게 사는 사람이다. 열린 문으로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나가는데 이 아빠는 반가운 얼굴이 아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아빠라는 사람이 정말 이렇게 하긴 힘들 텐데….) 그래서 아이는 아빠에게 곧바로 안기지 못하고, 오늘 무슨 일이 생겼나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있었나요 하며 아빠 눈치를 본다. 대견하게도 저들이 아빠 곁에 있다며 ‘아빠 힘내세요’를 반복하며 노래를 끝맺는데, 듣는 게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동요 하나에 만감이 교차해 가슴이 먹먹해진 아빠는 만들어진 지 30년은 됐음직한, 이 아빠가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노래를 아들에게 다시 들려주면서 또다시 울컥한다. 학원 생활에 찌들어 살 아들이(피노키오), 같이 잘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를 기다리다 꿈속에서야 아빠랑 노는 아들(아빠와 크레파스) 모습이 그려졌다. 이 아빠는 아들의 노래에 답할 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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