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화 환율 마지노선 넘어 폭락...석유·철강 대기업 부도설도 퍼져
디폴트 현실화하면 거래 많은 佛·伊·獨 금융권 피해 집중...
한국은 승용차·부품에 국한 전망
국제금융시장에서 ‘러시아 12월 위기설’이 확산되고 있다. 이달 들어 환율, 금리, 국가부도위험 등 러시아 금융시장의 주요지표가 순식간에 1999년 금융위기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이달 만기가 돌아오는 342억달러의 외채를 상환하는 과정에서 국가부도 혹은 그에 준하는 위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외환보유액 급속 소진ㆍ대기업 부도설
러시아는 지난 3, 4월 서방이 금융제재를 가하자 콧방귀를 뀌었다. 고유가 속에 쌓아 놓은 세계 3, 4위 규모의 5,000억달러 보유외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 기업과 은행이 투자금을 회수하고 배럴당 110달러였던 유가가 재정균형 수준(90달러) 이하로 곤두박질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루블화 가치를 35루블(달러당) 수준에 지키려고 외환을 쏟아 붓다 보니 이제는 4,200억 달러밖에 남지 않게 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장부상에 잡힌 4,200억달러 가운데 즉각 현금화가 가능한 건 2,700억달러에 불과하고, 당장 이달 340억달러 이상 상환에 이어 내년에도 1,300억달러를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시아의 12월 만기외채가 기업 270억달러, 은행 72억달러에 이르러 외부 공급선이 막힌 지금 상태로는 루블화 폭락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12월 첫 거래일 루블화가 러시아 중앙은행의 개입에도 불구, 마지노선으로 알려진 달러당 50루블을 넘어 선 것도 이런 불안심리가 작용한 탓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한국처럼 러시아 대기업의 부도설도 급속히 유포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인 로스네프트의 경우 내년 4월까지 210억달러의 외채를 갚아야 하지만 보유자금으로 상환 가능성이 희박하다.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푸어스(S&P)는 “위기를 넘기려면 러시아 정부의 자금 지원이 긴요하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또다시 외환보유고를 털지 않을 경우 부도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밖에도 러시아 최대 철강기업인 메첼도 파산 위기에 직면해 가뜩이나 부실 여신으로 취약해진 러시아 은행들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러시아 정부 “위기 국면” 처음 인정
상황이 이쯤 되자 ‘문제 없다’던 러시아 정부도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알렉세이 베데프 러시아 경제차관은 2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면서 “유가 하락이 핵심 원인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러시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내년에는 마이너스0.8%가 될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당초 내년 성장률 목표는 1.2%였다. 당장 이번 4분기 성장률도 제로이거나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당국은 내년 1분기부터 러시아 경기기 침체국면에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중앙은행장을 지낸 세르게이 두비닌도 루블화 폭락으로 지난달 실시된 자유변동 환율제와 러시아 은행의 차입비용 상승이 러시아 경제에 “나쁜 충격을 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금융시장에 일부 공포감이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크센니야 유다에바 부총재도 “러시아 중앙은행에서는 배럴당 60달러의 저유가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S&P가 지난달 러시아 신용등급을 ‘투기 수준’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 디폴트 경우 한국도 안전지대 아냐
만약 러시아 디폴트가 현실이 될 경우 러시아 금융기관과 거래가 많은 프랑스(477억달러) 이탈리아(277억달러), 독일(177억달러) 등 유럽 금융권에 피해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금융센터는 러시아 외환위기가 재발하더라도 한국 금융권의 직접 피해(13억6,000만달러)는 제한적이라고 예상했다. 러시아는 한국과 10대 수출국으로 연간 무역 규모(수출 112억달러ㆍ수입 115억달러)가 230억달러에 달하지만, 무역 부문의 피해도 승용차와 자동차 부품에 한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 구도를 강화할 경우 예상치 못한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신냉전 구도에 따라 구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한반도 불안이 높아진다면,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한국 경제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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