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중요한 신하를 ‘휴척(休戚)의 신하’라고 한다. 휴(休)는 안락, 척(戚)은 근심걱정이란 뜻이다. ‘우락(憂樂)의 신하’라고도 하는데, 나라와 함께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하는 신하라는 뜻이다. 나라가 태평할 때는 영예를 누리지만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목숨을 던지는 신하를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ㆍ조선의 국왕들은 신하들에게 “경은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말을 드물지 않게 썼는데, 한편으로는 영예지만 한편으로는 압박이었다. 영화를 누리는 것을 주불(朱?)과 은장(銀章)이라고도 한다. 주불은 붉은 색의 무릎 덮개로 고관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는 것이고, 은장은 2,000석 이상의 녹을 받는 벼슬의 경우 은으로 관인(官印)을 만들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진서(晉書) ‘열전(列傳)’에는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들을 대대손손 대우하겠다는 표현으로 ‘석지산천(錫之山川)’과 ‘서이대려(誓以帶礪)’가 나온다. ‘석지산천’은 공신에게 산천을 내려준다는 뜻인데, 원래는 시경(詩經) ‘노송(魯頌)’에 나오는 말로서 국가에 공이 많은 노공(魯公)에게 산천과 전토를 하사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서이대려’는 사기(史記) ‘고조공신년표(高祖功臣年表)’에 나오는 ‘사하여대(使河如帶), 태산약여(泰山若?)’의 약자로서 산려하대(山礪河帶)라고도 한다. ‘태산이 닳아서 숫돌(礪)이 될 때까지, 황하의 강폭이 좁아져서 허리띠가 될 때까지 공신들의 자자손손 작록을 누리게 하겠다’는 뜻이다.
나라에서 공신들을 이토록 우대할 때는 조건이 있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주불’과 ‘은장’의 영광은 누구나 누리려고 하지만 나라가 위태롭다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평시에 고위직의 호사를 누리는 인물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는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성호 이익이 ‘송나라 신하들의 사치’라는 뜻의 ‘송신사치(宋臣奢侈)’를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상으로 여겼던 중국 왕조가 송(宋)나라였다. 송나라는 문신(文臣)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천시한 문신우대 정책 때문에 문약에 빠졌다.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 출신의 송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자신과 같은 무신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신세력의 발호를 억제한 결과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문신 우대 정책만 높이고 무신 천시의 결과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조선의 문인들은 금(金)나라와의 결전을 주장했던 송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강(李綱ㆍ1083~1140)을 높게 평가했지만 이익은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익은 이강의 개인 재산이 국고보다 많았으며, 시첩(侍妾)과 가동(歌?)도 많았으며 옷과 음식이 극도로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비판했다. 빈객을 접대할 때면 안주와 반찬이 반드시 100가지에 달했고, 출타할 때면 먹을 음식을 수십 짐씩 싣고 다녔다고도 비판했다. 이익은 같은 글에서 조정(趙鼎ㆍ1985~1147)도 강하게 비판했다. 조정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정자(二程子)라고 떠받들었던 정이천(程伊川)의 제자로서 금나라와 화의를 주창했던 진회(秦檜)와 불화했다가 유배 가서 단식하다가 죽은 인물이었다. 이익은 조정이 거처하는 집 네 구석에 귀한 향불을 피워놓고 향운(香雲)이라고 불렀는데, 하루에 드는 향 값만 수십 민(緡)이나 될 정도였다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이들의 마음 씀과 행사(行事)를 보면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할 자들이 아니었다. 밖에서는 적들이 압박해오고 안으로는 민생들이 곤경에 빠졌는데도 먹고 즐기는 것만을 낙으로 삼았는데, 그들이 쓴 비용은 결국 백성들의 재력을 다 탕진시키고 나라를 좀먹은 결과 나온 것이었다. 송(宋)나라가 망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망한 것이지 이적(夷狄)이 망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송신사치’, 성호사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평소 양반으로서의 권리만 향수하다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도망가기 바빴다.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문벌(門閥)의 폐단을 논함’이란 글을 쓰는데, 여기에서 평소에 온갖 혜택을 누리던 사람들이 전쟁 때는 도망가기 바빴다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로 말하더라도 크고 작은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몰래 도망하여 뒤로 빠진 사람이 십중팔구였으니, 나라와 슬픔과 즐거움(休戚)을 같이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나라를 옹호한 사람은 누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러운 터에 청문회가 가까워오자 또 다시 후보자들의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해군 대장 출신의 국민안전처 장관 후보자가 위장 전입에 이어 연평도 포격 이틀 뒤 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 할 사람이 그렇게 없는 것일까? 소민(小民)들도 수긍할만한 인사를 보게 될 날이 오기는 할 것인지 궁금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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