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찌라시(정보지) 짜깁기”라고 폄하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루머’라고 일축하면, 국민이 품은 의문은 불식되는 걸까. 박근혜정부의 숨은 실세라는 정윤회씨 동향 문건이 어떤 과정으로 유출됐든, 국민의 관심은 정씨가 청와대 문고리를 지키는 권력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 등 실세들과 국정을 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는 문건의 내용이 어디까지 진실이냐는 점이다. ‘루머’라는 선언으로 의혹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청와대의 자체 조사부터 면밀해 보이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찌라시와 헛소문의 생명력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럴 듯하다는 데에 있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문건의 내용이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면 이 루머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 그 실체를 낱낱이 확인하는 것뿐이다. 우선 문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서 실제로 정씨와 문고리 3인방이 강남의 한 음식점에 모였는지, 의혹의 기초사실부터 밝혀야 한다. 바로 이것이 검찰이 해야 할 일이다.
검찰이 막 수사에 착수한 마당에 박 대통령은 문서유출을 ‘국기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문건의 내용은 ‘루머’라며 사실상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 만약 박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검찰이 문건 유출 경위를 파는 데만 수사력을 집중하고 내용의 진위 파악을 간과한다면, 루머는 죽지 않고 영원히 떠돌며 비선 실세들이 개입하는 갖가지 일들이 그럴듯하게 확대 재생산될지도 모른다. 필부들은 검찰의 수사과정과 결론조차 보이지 않는 실세들의 손에서 좌지우지된 결과라고 믿을 테니 말이다.
문건 파동이 의문을 키우고 관음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확대되는 이유는 곳곳에 있다. 처음에 찌라시라고 의미를 축소하던 청와대는 문건 유출자로 지목한 박모 경정을 공공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어쨌든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된 공식 문건은 맞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해 주면서 스스로 앞뒤가 안 맞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또 정씨는 ‘박 경정이 윗선의 지시로 문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면서 ‘보고서가 사실이라면 청와대에서 사실을 확인해 일벌백계를 했어야 했는데 그냥 넘어갔다’는 점을 한 근거로 댔다. 이런 사실로 조작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궁금하기는 하다. 정말 대통령이 이 보고를 받고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들에 대해 추가 확인을 지시하지 않고 일축했다는 말인가? 또 정씨 동향 보고서를 작성한 박 경정과 그의 상관이었던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1월 문제의 문건을 보고한 후 각각 2월과 4월에 청와대에서 쫓기듯 인사조치돼 나온 것도 석연치 않다. 결국 정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뜻일까. 대중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런 의혹이 검찰의 수사를 통해 밝혀지지 않는다면 루머는 꺼지지 않는다.
검찰이 진위 수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물론 문건의 내용 일부라도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 몰래 국정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공직자 기강 문란을 넘어 국기 문란에 해당한다. 문서 유출은 정권을 위협하는 데에 그치겠지만 비선들의 국정 농락은 나라를 위협하는 일이다.
최소한 청와대 비서진 사이의 권력다툼 내지 갈등은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 전 비서관은 “검증이 끝나지 않았는데 인사 발표가 나기도 했다”며 문고리 3인방의 월권을 주장했다. 지난해 공직기강비서관실이 비리 행정관을 10명이나 적발할 정도로 강도 높은 기강잡기에 나서면서 다른 비서관들이 조 전 비서관을 불편해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박 경정이 유출자라는 청와대 주장과 달리 청와대 내 제3자가 문건을 빼돌려 유출했다는 정황도 비서진 사이의 갈등과 알력을 엿보게 한다.
국민들은 이번 사태를 통해 자연스레 청와대 비서진들의 일과 관계를 알아가고 있다. 비서진들 사이의 갈등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정권에 대한 우려와 불신이 커지고 있다. 그러니 검찰이 국민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국정 안정에 기여하는 일이다.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른 검찰을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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