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그의 시전집 첫 완역
“서정주와 김수영과 김남주가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저를 서글프게 했습니다.”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문학동네)을 최초로 완역한 김정환 시인의 말이다. 폴란드 시인의 시 속에서 한국 거장의 시세계를 골고루 경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헤르베르트(1924~1998)가 삼인분의 시적 역량을 지녔다는 말도 아니다. 서정주의 서정성과 김남주의 투쟁정신, 김수영의 혁명성이, 진영 논리 위에서 갈갈이 찢겨 소비되는 한국 문단의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김정환 시인은 2일 시집 출간을 기념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는 시도, 평론도 진영으로 갈려 이것이 젊은 시인들에게 나쁜 의미의 ‘중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와 저항의 시인으로 불리는 헤르베르트는 2차대전 당시 식민 치하의 폴란드에서 활동했다. 그는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소비에트 정부가 강요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 양식에 반대하며 정부가 공인한 폴란드문인협회에서 탈퇴했다. 은행 사무원, 가게 점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인은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사회 전반에 자유로운 분위기 확산되자 32세인 1956년 비로소 첫 시집 ‘빛의 심금’을 출간했다.
김정환 시인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헤르베르트의 전집을 완역하기로 결심한 건 1982년 자신이 번역한 시 ‘비’ 때문이다. 그는 “당시 ‘폴란드 민족시집’에 실렸던 시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라며 “영어중역이라 늘 께름칙했는데 이번에 원본을 샅샅이 살펴 번역했다”고 말했다. 전집에는 헤르베르트의 첫 시집부터 ‘헤르메스, 개와 별’ ‘시적인 산물들’ ‘사물연구’ ‘명’ ‘코기토 씨’ ‘포위 공격 받는 도시에서 온 소식’ ‘떠나 보낸 비가’ ‘로비고 지방’, 마지막 시집 ‘폭풍의 에필로그’까지 총 10권의 시집이 모두 수록됐다.
김 시인은 헤르베르트를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포함한 모든 ‘주의’를 문학의 적으로 인식한 가장 위대한 반공 시인”이라 평하며 “그의 시가 진영논리로 분열한 한국 시단에 좋은 중력으로 작용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198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와 헤르베르트를 비교하며 “헤르베르트가 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노벨상이 망명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라며 “검열을 피해 망명하거나 절필하지 않고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 시대를 살아낸 것이 오늘날 폴란드인들에게 헤르베르트의 시가 경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헤르베르트 전집은 문학동네와 김정환 시인이 함께 만드는 세계시인전집의 세 번째 책이다. ‘셰이머스 히니 시 전집’ ‘필립 라킨 시 전집’이 이미 나왔고 앞으로 안나 아흐마토바(러시아),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 조지 세페리스(이상 그리스), 로버트 프로스트, 실비아 플라스, 월리스 스티븐스(이상 미국), 페데르코 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세사르 바예호(페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아일랜드) 등 9명의 전집이 더 나올 예정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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