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결성 후 120여명 가입 ‘생존자 네트워크 이후’ 활동 활발
옷차림 등 피해자에 이유 돌리고 사법부는 가해자에 솜방망이 처벌
“‘이렇게 해야 성폭력을 안 당한다’는 식의 교육은 잘못됐습니다.”
숨는 것을 거부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며 이로 인해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2차, 3차의 추가 피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한다. 지난 5월 결성 이후 현재 120여명이 가입해 있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 모임인 ‘생존자 네트워크 이후’(이후).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11월 25일~12월 10일)을 맞아 이후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 4명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삶일까. 이들은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죽여 살아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너울(39ㆍ필명)씨는 “최근 용기를 내 공무원 단체에 강의를 나가 친족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50대 남성이 ‘창피하지도 않냐. 좋은 이야기만 하고 다녀야지’라며 공개적으로 항의를 한 적이 있다”며 “이런 사회라면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6세 때 이웃집 10대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지선(24ㆍ이름만 공개)씨는 “어린 시절 돌봐줬던 친엄마와 같은 보모에게 훗날 성폭행 경험을 털어놨더니 ‘계속 곁에 있었는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자기 방어만 하더라”며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는 대중들이 많지만 실제 자기 주변의 일이 되면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거리를 둬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를 위한 논리
이들이 모임을 만든 것은 치유의 목적도 있지만 피해자의 이야기는 없고 가해자의 논리만 가득한 현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주변의 응원도 힘이 되어 주었다.
2년 전 동네 음악학원 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지숙(24ㆍ이름만 공개)씨는 “‘다 너에게 잘 해주려고 그런 건데’라는 변명을 들었을 때 너무 황당했다”며 “자기 멋대로 음악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등 도움을 주면 성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여전히 가해자 측에 온정적이라고 비판한다. 너울씨는 “직장생활 태도와 성폭력은 아무 관계도 없는데 가해자 측 변호사가 ‘평소 지각 안 하고 프로젝트를 잘 수행하던 인물’이라며 옹호할 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점막과 침샘이 마르고 근육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강한새(23)씨는 성폭력 피해 이후 가해자가 받은 ‘솜방망이’ 처벌에 또 한번 좌절해야 했다. 그는 “가해자가 중증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며 “피해자는 정신적 피해는 물론이고 정상적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신체적 손상까지 입었는데 가해자 사정을 더 봐주는 느낌이 들어 속이 탔다”고 토로했다.
“성폭력은 옷차림, 시간과 관계 없다”
이들은 성폭력이 발생한 이유를 피해자에게 돌리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늦게 다니지 않아도, 옷을 야하게 입지 않아도 성폭력은 발생하기 때문이다. 너울씨는 “우리끼리 농담으로 피해를 입어 경찰서에 갈 때에는 화장을 지우고 옷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걸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며 “마치 품행이 바르지 못해 성폭력이 일어난 것처럼 피해자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선씨도 “어떻게 하면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반성하게 만들거나 가해 예방 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성폭력 피해는 상처를 치유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려 피해자들의 사회 적응이 어려운 만큼 사회적 지원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너울씨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들끼리 모이는 것만큼 치유에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에 미국 등에는 피해자 치유 모임을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후는 매월 1회 이상 모여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처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기록화 사업의 첫 결과물인 회원 5명의 수기집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출판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곳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글ㆍ사진=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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