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50년대 日 바둑계 군립...조훈현 9단과는 동문 사형 관계
‘현대 바둑의 창시자’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불리던 바둑계의 큰 별 우칭위안(吳淸源) 9단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기원은 1일 우칭위안이 지난달 30일 새벽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의 병원에서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했다.
우칭위안은 1933년 기타니 미노루 당시 5단과 함께 ‘신포석(新布石)’을 발표해 현대 바둑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며 1930~1950년대 일본 바둑계 1인자로 군림했다. 국내에는 조훈현(61) 9단의 동문 사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에서 태어난 우칭위안은 부친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 처음 바둑을 배웠고, 1928년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바둑계 원로인 세고에 겐사쿠(1889~1972) 문하에서 바둑 수업을 정식으로 시작했다. 세고에가 받아들인 제자는 우칭위안과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조훈현 세 명뿐이었다.
우칭위안이 1933년 발표한 신포석은 ‘흉내 바둑’과 ‘3ㆍ3, 화점, 천원 착점’ 등 관례를 깬 파격적인 포석으로 바둑의 현대화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39년부터 시작한 기타니와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 승리해 일본 바둑계 1인자가 됐다. 이후 1956년까지 이어진 가리가네 준이치, 후지사와 구라노스케, 하시모토 우타로, 이와모토 가오루 등과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도 잇달아 승리해 일본 바둑계를 평정했다. 치수 고치기 십번기는 일본 에도 시대에 시작한 바둑 고수들의 맞대결로 바둑을 10번 둬서 4판 차이가 나면 치수를 고치는 대회다. 그의 십번기 총 전적은 10승 1무 1패였다.
우칭위안은 1984년 은퇴 후 문하에 린하이펑, 루이나이웨이 9단을 두고 있다. 말년에는 중ㆍ일 문화교류에 앞장서 왔으며 올해 8월 25일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로부터 ‘평화발전공로상’을 받았다. 6월에는 100번째 생일을 맞아 성대한 축하연이 열렸는데,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도쿄 본사에서 별도로 우칭위안의 '백수 축하연'을 열기도 했다. 우칭위안은 후세 바둑 기사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세돌 9단이 우칭위안에 대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의 10분의 1만 돼도 만족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과 중국은 중국 출신의 일본 귀화인으로 살았던 우칭위안의 별세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일본 NHK는 “화려하고 자유로운 기풍과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바둑의 신’이었다”고 했고 아사히신문은 “신포석으로 바둑계의 혁신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인터넷 매체 펑파이신문망은 세 차례 국적을 바꾸며 살아온 인생사를 집중 조명했다. 우칭위안의 영결식은 친족장으로 진행되며 후일 별도로 작별의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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