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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국전쟁설과 사회의 균열

입력
2014.12.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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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가을이었다. 강원도의 한 보충대에선 신병들 중 기독교 신자들을 한 데 불러 모았다. 그날은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 종말을 예고한 날이었다. 군종병은 반짝거리는 귤 하나씩을 우리 손에 쥐어줬고, 군목님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설교를 하셨다. 설교 끝엔 절대 오늘 밤 동요하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다음 날 새벽에 들려온 기상 나팔은 제대까지 들어야 할 800여 번의 기상 나팔 중 겨우 세번째였다. 차라리 저게 천사의 나팔소리였으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한국 교회 내부에 국한된 일이었다. 당시 검찰은 휴거 예언에 앞장섰던 선교회를 수사했고, 신학자 안병무는 성경에 엄연히 수록돼 있는 예언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근본주의의 일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칼럼을 썼다. 당시 정부는 종교가 세속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단호했고, 신학자들은 교회 스스로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최근 ‘12월 한국전쟁설’이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전쟁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저마다 유튜브 계정을 개설해 이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전쟁설 지지자들은 오프라인으로 진출해 대학로, 서울역 등에서 주기적인 모임과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전쟁을 피해 이미 단기비자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거나, 자신을 받아줄 해외 교회나 선교지를 알아보는 중이다.

지난 날 안병무의 고민은 12월 한국전쟁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몇몇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전쟁설의 문제점을 경고했지만, 전쟁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초청해 집회를 연 교회들은 이미 전국에 분포돼 있다. 신과 방언으로 대화하고 이를 직접 통역해준다는 전도사의 능력을 보려는 이들은 스가랴의 양떼처럼 많다.

하지만 전쟁 이야기가 도를 더할수록 이들은 지난 날 안병무의 예상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이들은 전쟁을 막고 구원받기 위해 회개하라고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전쟁의 징후와 증거가 이미 교회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 전쟁을 계시받은 전도사에 따르면 청와대와 국방부는 이른바 종북세력에 의해 장악됐기 때문에 땅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들의 모임에선 땅굴로 침투한 북한특수부대가 1980년 광주의 민간인 사살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담은 한 종편의 동영상이 확실한 증거라며 상영된다. 6ㆍ15 공동선언을 비난하는 보수 논객의 칼럼이 낭독되고, 공동선언을 이끌었던 대통령을 지옥에서 봤다는 입신 체험이 이어진다.

오바마와 루스벨트, 두 민주당 출신 미국 대통령은 경제불황에 대한 서민의 불만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80여년 전의 루스벨트가 90% 넘는 지지를 받았던 남부 4개 주에서 오바마는 모두 실패했다. 남부의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부자 정당이라고 할 공화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노틀담 대학 사회학과의 로리 멕베이는 이 차이를 KKK의 경험에서 찾는다. 사실 KKK는 정치적-윤리적 실패로 막을 내렸고, 그 기간도 그리 길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짧은 경험이 사회 속에 깊은 자국을 남겼는데, 이는 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양극화시켜 놓은 것이다. KKK활동 기간 동안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은 민주당의 인종정책을 지지하지 않게 됐다. 이런 문화적 지향성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재정립한 남부 백인 노동자들은 KKK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결국 자기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2월이 평화롭게 지나가면 한국전쟁설도 가라앉을 것이다. 사실 국방부 장관도 종북이고 청와대가 프리메이슨의 명령을 받고 있다는 대목만 봐도 12월 전쟁설의 허구성은 금방 드러난다. 하지만 이 한 달짜리 종말론이 지나간 자리엔 교회와 종편과 대북전단과 보수현대사 사이의 네트워크가 남을 것이다. 이들이 지향하는 바의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타고 뻗어나갈 것이 틀림없다면, 거기에 지성의 양심과 예수의 기쁜 소식은 어디서 자리를 찾을 것인가. 양심과 복음이 서로에게 귀 기울일 때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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