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부터 마니아적 작품까지
1년간 브로드웨이서 32편 관람
연극 본고장의 생생한 기록 담아
“환승역 도버에 닿을 무렵 비는 더 세차게 몰아쳤다. (중략) ‘드-오버(D’over)’, 불어와 영어를 섞어놓으니 종말이라는 뜻이 된다. 땅이 끝나는 곳. 갑자기 ‘도버로, 도버로, 도버로!’라는 외침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리어왕’의 실명한 글로스터 공작이 목숨을 버리기 위해 도버 해안의 깎아지른 절벽에 데려다 달라는 외침. (중략) 연극 속 종말의 도버와 지금 이곳 환승역 도버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절벽 아래 순백의 모래사장이 펼쳐진 상상 속 도버와 달리, 현실의 도버는 쓰레기와 온갖 잡동사니들이 역사 주변에 널브러져 있고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남루한 주택들과 퇴락한 아파트들이 황량한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도버와 이전의 몇 개 역들의 승객은 대부분 뉴욕시의 밑바닥 직업군을 형성한다. 욕망의 도시를 향해 쏟아져 들어가는 그들에겐 그래도 종말이 아니라 환승의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에게 도버에서의 장엄한 추락사가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저들에게도 더 나은 삶으로의 환승은 끝내 환영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39, 40쪽)
여행기일까 연극 비평서일까. 극장으로 향하는 길 위의 풍경이 무대와 겹치고, 연극의 주제가 관객의 삶과 포개진다. 연극학자이자 영어영문학전공 교수인 강태경 이화여대 교수의 책 ‘브로드웨이의 유령-한 연극학자의 뉴욕 방랑기’는 일상과 무대의 경계를 허문다. 미국 뉴저지주와 뉴욕시를 이어주는 환승역 도버에서 그는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데이비드 헨리 황 연출의 ‘춤과 철도’를 떠올렸다. 이민과 환승, 희망과 절망. 추상적이고 뻔한 단어들이 나열된 문장은 일상과 무대를 오간 덕에 생명력을 얻는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300여일의 뉴욕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강 교수를 만났다.
“무대는 세계의 메타포(은유ㆍ암유)고, 배우는 인간의 메타포예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입니다.”
그를 만나자마자 책 구성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셰익스피어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답게 강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명언 “세상은 무대, 인생은 연극”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좋은 연극에는 반드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 깊은 울림을 주느냐, 그것이 예술의 핵심이자 본질이에요.” 뉴욕 거리를 관찰하던 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난 답변이었다.
지난해 1월 연구년을 맞아 1년간 브로드웨이를 탐방한 그는 “사실 처음부터 연극을 소재로 책을 쓸 계획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뉴저지주에 거처를 마련한 김에 “놀러 삼아” 브로드웨이를 다녀온 후 “한국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브로드웨이 소식을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러다 지인들의 반응이 좋아 본격적으로 뉴욕 거리와 연극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와 빌리즈 보이스에 실린 연극리뷰를 보고,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에 이메일을 보내 정보를 얻었다. 그렇게 1년간 꼬박 32편의 연극을 관람했다.
보통 연극 비평서에 실린 연극은 저자의 관심사에 따라 하나의 주제로 묶이기 마련이지만 책은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등의 고전에서부터 ‘낸스’ 등 마니아적 요소가 강한 오프브로드웨이 연극까지 다양한 작품을 망라한다. “뉴욕 연극의 전모를 보려 했다”던 그는 “오프오프브로드웨이와 브루클린 연극이 아직도 예술로 살아남은 원동력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각기 다른 주제를 심고 있지만 그의 책은 결국 ‘인간’을 남긴다. 무대를 만드는 인간, 무대로 향하는 길에 만난 인간, 그리고 무대를 보는 인간 등 그의 책은 끊임 없이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 ‘사천의 착한 사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직접 만났던 극장 직원과 대학생들을 소재로 삼고 광대쇼 ‘낡은 모자’를 소개하면서는 실제 그가 광대 모습으로 강단에 섰던 시절을 회고하며 “우리 모두 바보 광대”라고 말한다.
관객 관찰도 빠지지 않는다. 노인 관객들의 대화를 엿들은(?) 에피소드들은 때로는 웃음을 주고 때로는 브로드웨이의 공연 문화에 새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노인 관객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웬만한 비평가 못지 않은 대화가 오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우리나라에 없는 이런 문화는 결국 교육시스템에서 비롯되는데 초ㆍ중ㆍ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직접 연극무대에 서 본 서양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꾸준히 공연을 관람하면서 지식과 교양을 쌓은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 담긴 날카로운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강 교수가 연극비평가로서도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왜 전문 비평가로 나서지 않는 걸까. 해답은 책 속에 있다. “졸업반이 돼서야 연극반에 첫발을 디딘 후배가 그 공연으로 연극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중략) 후배가 젊은 날 좇아간 꿈을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내가 좇으려 한다. 극작의 꿈을 꾼다. (후략)”(376쪽) 젊은 시절 연극연출가의 꿈을 꾸기도 했던 강 교수는 이제 극작가로서 “바깥에서 보고 평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연극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디딤돌로 오래 전부터 극작 번역, 드라마트루기 등으로 한태숙 연출과 호흡을 맞춰왔다. 책 제목도 뉴욕을 방랑하던 그를 보고 한태숙 연출이 “브로드웨이의 유령같다”고 한 데서 비롯했다.
“학기 초에는 어떻게든 하루 1시간 글을 쓰는데 학기가 진행되면서 시간 내기가 너무 어렵다”며 웃은 그는 “그럼에도 복제불가능한 공연예술의 매력을 잊을 수 없어” 여전히 ‘연극쟁이’의 꿈을 꾼다. 그가 책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한 연극 ‘라 디비나 카리카투라’가 미완의 공연이라는 점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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